니케ニケ(NIKE)
들풀로 만드는 월계관
추락에서부터 비상하는 승리의 여신
하쿠신 니케 霸九心 ニケ
1994년 4월 6일 생
이름의 니케(ニケ)는 신화 속 승리의 여신 니케(Nike)에서 따온 것이라 한자 없이 가타가나로 쓴다. 외국인 혼혈이었던 운동선수 아버지와 패션계 유명 모델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결혼한 사이가 아닌 한 철 뜨거운 감정으로 만나던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자 둘은 아이의 첫 돌이 오기 전 결별, 각자의 세계와 커리어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이를 가엽게 여긴 니케의 외할머니가 홀로 지내는 적적함을 달래고 싶다며 니케를 맡아 키우게 된다. 니케의 친부는 친모에게, 그리고 친모는 니케의 외할머니에게 주기적으로 거액의 돈을 보내고 있는데 니케의 외할머니는 종종 이를 두고 돈 안 궁하니 와서 아이 얼굴이나 보고 가면 좋겠다고 하나 니케는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모의 얼굴도 친부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니케가 부모 얼굴도 모르고 자신과만 사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런 것이지만 니케는 할머니가 있는데 아쉬울 것이 뭐가 있느냐 한다.
금빛이 도는 백발, 주황빛과 노란빛이 일렁이는 금색 눈동자는 혼혈인 아버지 쪽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 길고 늘씬한 몸매나 이목구비 생김은 주로 어머니를 닮았다.
도쿄에서 베이커리를 크게 하는 니케의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니케와 둘이서 오손도손 살고 있다. 베이커리의 최고 인기 메뉴는 단팥 크림빵, 소금빵, 그리고 애플파이.
니케의 이름은 아버지가 어머니와 만난 이후 리그에서 우승을 하고 그녀는 자신의 승리의 여신이라며 인터뷰한데서 따왔다.
1
할머니는 늘 일이 바빠 가게를 비울 수 없었던 까닭으로 집에 어린 아이 혼자 둘 수도 없는 노릇이라 보통 니케도 베이커리에 데려온다. 할머니가 일하는 동안 책방에서 빌려온 만화책을 읽으며 종일 베이커리에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가게의 단골 아주머니들은 니케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식빵, 바게트 등을 골라 담고는 할머니 방해 안하고 의젓하게 (만화)책보고 있다면서 기특하다고 니케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신다.
그날은 그런 아주머니 한 분이 오후 무렵 베이커리를 방문하셨는데 늘 혼자 방문하던 여느 날과는 다르게 작은 남자 아이와 함께였다. 니케의 할머니는 특히 아이들을 좋아하셨다. 작은 손님과 함께 한 단골 아주머니와 살갑게 안부를 나누는데, 아주머니는 마침 아이들의 나이도 비슷하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며 둘이 같이 놀면 좋지 않을까 제안하셨다. 그 순간에도 가게 한 켠에서 어제 빌려온 만화책을 읽고 있던 니케에게 집에 만화책도 게임기도 많단다? 하는 그 또래 아이들에게 제법 달콤한 말을 덧붙이는 것도 빼놓지 않으며.
그날부터 니케는 베이커리에서 종일 지내는 대신 남자 아이네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아주머니는 니케가 남자 아이인 줄 알고 낯 가리는 일 없이 스스럼없고 싹싹한 니케가 다소 소극적인 아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어 종일 게임만 하는 아들이 밖에 나가 놀기도 하고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니케가 여자 아이였다는 걸 알게 되고는(니케네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다 할머니가 니케를 '손녀딸'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처음 알았다) 그 후엔 딸 한명 생긴 것 같다며 좋아하셨다. 오해할 만 했던 것이 니케의 삐죽거리는 머리칼은 남자 아이들보다 짧았고 그 또래 여자 아이들이 좋아할 예쁜 옷은 커녕 체육복 반바지 차림으로 하필 그날따라 읽고 있던 만화책은 무협지였다.
"머리...는 원래부터 짧았어?"
"병원에서 검사한다고 잘랐는데! 이상해?"
"병원? 왜? ... 딱히 안 이상해."
"나도 몰라. 이상없대! 그래서 그냥 다시 기르려고. 지금이 더 좋아?"
쿠구구구 뿅뿅뿅뿅 쾅!! 아 켄마, 죽었잖아!
"아니, 별로 둘 다... 상관없어."
GAME OVER
반짝거리는 TV 화면 속 글자가 소년의 눈동자에 비쳐 깜빡인다.
곤란한 낯을 하는 소년의 이름은 코즈메 켄마. 켄마의 어머니가 처음 기대한 방향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무슨 일이든 의욕 없고 하기 싫은 것들이 또렷한 켄마와 뭐든 강한 호불호가 없는 무난한 성격의 니케는 아이 곁에 붙어 있을 수 없는 바쁜 어른들을 보호자로 둔 어린이들에게 종일을 함께 보낼 짝으로 상성이 꽤 괜찮았다. 니케는 점프 코믹스가 월별로 빼곡히 진열된 책장이나 구경도 해본 적 없는 온갖 게임에, 켄마는 그동안은 손대보지 못했던 게임 2p 루트에 도전해볼 수 있게 됐다는 것에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제 집처럼 켄마네 방을 드나들던 니케 덕에 일년 사계절을 붙어 있던 두 사람이 베이커리에서 만난 이후 처음으로 떨어져 지내게 된 건 니케가 먼저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켄마도 다음해 같은 네코마 초등학교로 입학했으나 학년이 달랐던 둘은 학교가 같아도 자주 볼 수 있진 않았고 니케가 육상부를 하기에 더욱 그랬다. 입학하자마자 실시한 체력 검사에서 반마다 기록이 좋은 사람들을 학교 육상부에 오라고 권유했다나. 니케는 뭔지도 정확히 모르고 들어간 눈치였으나 생각보다 즐겁게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에 제대로 플레이하려면 꽤 숙련이 필요한 액션 게임을 알려주는데 처음 하면서도 금방 익숙하게 공격기며 방어기며 연이은 콤보를 쓰는 걸 보고 배우는 센스가 좋거나 보통 이상가는 운동 신경이 있거나 하겠다 생각은 했었던 켄마였다.
니케가 없으니 2p로 해야 하는 게임들은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아니 그것보단 한번 읽고 마는 주간 점프가 아까운 것 같았다. 전에는 만화책 한번 읽고 영영 책장에 꽂아 두는 것에 아무 생각 없었는데. 어쩌면 그것보단 애플파이와 슈크림파이를 두 개 포장해와서 반씩 잘라 나눠 먹지 못하는 것이 조금 더 아쉬웠는지 모르겠다. 사실 애플파이가 더 맛있으니 그것 하나만 먹는 것도 상관없지만.
GAME OVER
딴 생각을 하는 동안 언제 떴는지 모르겠는 게임 오버 문구를 쳐다보다 이내 게임기를 침대 한쪽으로 던지고 푹 하고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던 중 코즈메 켄마의 평화로운 일상에 파문을 일으킨 또 다른 한 사람이 나타났다. 니케네 보다도 훨씬 가까운 바로 근처 이웃집으로 이사온 이상한 머리의 남자애. 낯선 곳에 이사온 탓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어지간히 숫기 없는 자신보다도 심각할 정도로 낯을 가리며 눈치를 보는 바람에 옆 사람까지 되려 불편해지게 하는... 마치 바짝 선 닭벼슬같은 머리를 한 그런 남자애였다.
나이만 비슷하면 친구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에 떠밀려 이번엔 이 남자애가 옛날에 니케가 그랬던 것처럼 종종 집에 찾아와 같이 게임을 하는데 거의 두어달 내내 달리 말도 없이 첫날 권했던 게임만 하다가 결국 켄마가 먼저 입을 열게 된다.
'뭐 다른거 하고 싶은 거 없어?'
그리고 그건 아마 적어도 앞으로의 12년... 아니 그 이후로도 코즈메 켄마 인생 전반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게 될 한마디였다. 이게 다 그 닭벼슬머리, 아니 쿠로오 테츠로가 지나치게 낯을 가렸던 탓이다. 무릇 경기에서도 자신보다 더 긴장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오히려 긴장이 풀려버리지 않나. 그 소극적인 코즈메 켄마가 본인보다 영 심각한 쿠로오 테츠로를 보다 못해 일어난 일종의 이레귤러같은 거였다.
생각한 방향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고 싶은 거 있냐는 말에 쿠로오가 가져온 배구공과 함께 둘은 밖으로 나갔다. 지금까지 쿠로오가 말하는 걸 들은 것보다 오늘 이 공터에서 들은 말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큰 소리로 웃고 큰 목소리로 말하는 쿠로오는 처음이었다. 움직이는 건 내키지 않지만 몇 달 내내 불편하게 굴었던 기류가 걷히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고 켄마는 생각한다.
배구는 공을 '이어가는' 스포츠다. 둘만으로는 공을 올리고 넘기고 다시 받는 랠리를 만들어내기는 무리다. 배구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봐. 나 같은 초짜랑 해봤자 재미없잖아(쿠: 재미없지 않아!). 배구를 할 수 있는 사람... 주변에... 그리고 그 생각과 동시에 떠오르는 유일한 사람은...
니케네 베이커리에 전화가 울렸다.
"네, 하쿠 바 상의 베이커리입니다!"
"니케??? 오늘 연습없어? 니케 언제 오냐고 할머니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켄마! 연습은 선생님이 다른 일이 생겨서 일찍 끝났는데 베이커리에 새 라벨 붙여야 한대서 여기 왔지."
"아 바쁘겠네. 별 일은 아니니까 그냥 나중에 우리 집 앞에......"
니케! 라벨지 그만 찢어먹고 켄 쨩한테 가봐라!
"...아니, 나 방금 해고됐어. 어디로 오라고?"
베이커리의 잔일에서 벗어나게 돼서 신났는지 니케는 한달음에 공터에 왔다. 느슨하게 묶인 긴 머리가 여러 갈래로 빠져나와 등과 어깨에 흘러내리는 것이 니케가 얼마나 서둘렀는지 짐작하게 한다.
"앗 너 1반에......!"
"켄마! 그리고......
쿠로(黒), 맞지!"
"...쿠로오 꼬리(尾)가 없어졌네."
쿠로오(黒尾)가 이미 니케를 알 것 같다고는 생각했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지만 옅은 머리색 때문을 차치하고도 육상부가 전국급으로 이름 난 이 학교에서 저학년부 최고 에이스인 니케는 이미 타학년까지 유명할 거다. 하긴 학교 입장으로도 니케(Nike)라는 승리의 여신 이름 갖고 소년체전에서 그렇게나 메달을 쓸어 오는 사람의 이름은 커다랗게 걸어서 자랑하고 싶을만 하다 싶긴 하지만. 월요조회에 교장이 니케를 불러서 그 성과를 칭찬할 때 어찌나 입이 귀에 걸렸던지 그 늙은 영감의 10년은 회춘한 것 같은 모습이 전교의 교실 화면으로 빠짐없이 송출되었으니 말은 다했다.
그런데 니케 쪽에서 쿠로오를 알고 있는 건 의외였다. 먼 지역에서 도쿄 네코마로 전학온 지 이제 두어 달 된 쿠로오를. 또 그렇게 심하게 낯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완벽하게 기억하진 못했는지 꼬리(尾)는 떼먹어서 쿠로(黒)가 되긴 했지만. 확신에 차서 쿠로 맞지! 하고 도전 골든벨 정답마냥 외치는 니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푸학, 하고 웃음이 나버렸던 켄마였다. 꼬리는 없어졌지만서도 깜짝 놀란 쿠로오가 어떻게 아냐고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모를 수가 있나! 점심시간에 육상부 애들이랑 공놀이 하는 거, 매일 창문에서 쳐다보던 사람, 너 맞지?"
그 말을 들으니 왜 니케가 쿠로(黒) 라고 기억하는지 이해가 갔다. 그 거리에서 창문의 쿠로오를 보면 확실히 저 큼직하게 뾰족거리는 머리가 새카만 실루엣으로 보였을 터다. 그보다 매일 쳐다봤구나. 어지간히도 목말랐었나 보다. 공을 잡는 감각에.
셋이 모이니까 훨씬 뭔가 그럴듯한 모양이 나왔다. 하나는 공을 올려주면 하나는 공을 때리고 하나는 공을 받아올려 공이 돌아왔다. 역시 센스가 좋다. 피차 배구는 처음인데 니케는 쿠로오가 여길 이렇게 쳐야한다, 이렇게 받아야 한다 하는 둥의 말들을 신기하게 그대로 몸으로 보여줬다. 그 신통한 모습을 보는 게 더 재밌을 지경이었다. 쿠로오가 니케하고도 오래 낯을 가려서 또 피곤해지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 걱정은 필요 없어 보였다. 쿠로오 얼굴이 몇 달 본 중에 제일 즐거워 보였으니.
셋이서 그 주 토요일 시민 체육관을 찾았다. 켄마는 쿠로오도 니케도 오래도록 이 날을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사실 그건 켄마도 마찬가지였다. 스파이크는 키가 커야 할 수 있다며 부러움과 선망의 눈으로 스파이크 연습을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쿠로오에게 '그럼 네트를 낮추면 되지.' 라며 처음엔 우선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느끼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을 한 어떤 노인의 말대로 결국 자신의 손으로 스파이크를 성공해냈을 때의 쿠로오의 얼굴이나, 그곳 어린이 팀 간이 시합에 껴서 뛰어본 생애 첫 배구에서 어설프게나마 받아 올린 공이 같은 팀의 득점으로 이어지고 손바닥을 마주치며 나이스 리시브 니케, 를 외치는 동료들의 말에 짓던 니케의 표정을 누구보다도 똑똑히 목격한 건 켄마였으니까. 둘의 그 얼굴을 보면서 이 날은 쿠로오에게도, 니케에게도, 그리고 이 '세 명'이란 만남에서도 어떠한 기점이 될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부터 쿠로오는 급속히 귀찮아졌... 배구를 좋아하게 됐다. 새 팀에 들어갔고 학교에서 친구도 늘었으며 배구 이외의 다른 얘기도 잘 하게 됐다. 하지만 근처에 배구를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역시 켄마네 집에도 자주 갔다. 셋은 쿠로오가 들고 온 경기 녹화 영상을 켄마네 방에 모여 같이 보곤 했는데 니케가 중간부터 잠들고 쿠로오가 꾸벅꾸벅 졸아도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눈을 떼지 않고 선수들의 전략을 캐치하며 집중하고 있는 켄마에게 쿠로오는 역시 넌 세터가 되란 말을 하기도 했다. 참모 느낌이라 멋있다고.
쿠로오는 배구 팀에서 배워온 건 전부 켄마와 니케에게 구구절절 가르쳐주었다. 그 덕에 쿠로오 뿐만 아니라 이 둘까지도 시나브로 실력이 늘어갔는데 쿠로오는 그걸 체감할 때마다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육상을 해서 그런지 재빠르고 파워가 좋았던 니케에게 스파이크를 가르쳐 주고는 니케가 켄마가 올린 토스를 전과는 비교도 안되는 소리로 파앙! 하고 쳐내자 쿠로오는 마치 자기 학생들이 시합에서 이긴 감독님같이 환호했다. 「승리의 무적 대포」라든지 「관동 무법지대」같은 들어주기 힘든 이상한 별명도 붙여가면서. 그렇게 셋이서 틈만 나면 처음 만난 공터에서 배구를 했다.
니케는 그 다음해 육상부에서의 생활을 정리했다. 그리고 쿠로오가 먼저 들어가 있는 배구 팀을 찾았다. 네코마 초등학교 육상부 스타 니케의 청천벽력같은 탈퇴 소식에 육상부 뿐만 다른 친구들까지도 경악을 했는데, 쿠로오와 켄마도 이유야 '배구하고 싶어서'란 걸 알지만 육상부를 나갈 거라곤 생각을 못했긴 마찬가지였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육상부 코치가 니케를 붙잡고 다시 차분히 생각해보라며 육상부에 남아준다면 반드시 널 올림픽 무대까지 이끌겠다고 했으나 니케는 '배구로 올림픽 메달을 따오는 걸 지켜보시라'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해 코치가 뒷목을 잡았더라고 한다.
훗날 켄마와 쿠로오는 이를 두고 어떻게 배구를 하겠다고 과감하게 육상부를 나간 건지 물었는데 이에 니케는 그렇게 답했다.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해도 나 혼자만 즐겁다고, 육상은. 그런데 배구에서는 아니라고. '이쪽' 전부가 아군이라고. 내가 받아 올린 공이 득점으로 이어지고 '이쪽' 모두가 나랑 같은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것이 너무 두근거렸다고. 오히려 육상도 해봤기 때문에 더 그 차이에 전율이 왔던 거라고. 니케는 그렇게 말했다.
'나이스 리시브 니케!'
셋이서 찾아간 토요일 체육관에서 봤던 그때 니케의 그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2
당연하게도 중학교에 가자마자 쿠로오와 니케가 찾아간 곳은 학교의 배구부였다. 쿠로오는 도립 네코마 중학교 남자 배구부, 니케는 여자 배구부. 이제부턴 학교마다 있는 정식 배구 팀에서 뛰게 된다. 타학교와의 경기도, 대회도 잔뜩 기다리고 있다. 네코마중 남자 배구부는 딱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인원이었고 여자 배구부는 제법 사람이 많아 그래도 남자 배구부보다는 탄탄한 팀이었다. 남녀 팀 모두 이름 난 강호는 아니지만... 일본의 중학교 여자 운동부는 배구부 총 인원이 가장 많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좀 더 다양한 훈련을 할 수 있었던 니케 쪽에서 하교 후에 이것저것 배운 걸 잔뜩 꺼내면 두근거리는 마음에 당장 해보고 싶어서 켄마를 불러냈다. 내년에 켄마까지 중학교에 오면 반드시 배구부로 데려 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켄마는 세터, 나머지는 미들 블로커, 윙 스파이커라 셋이 있으면 연습하기 아주 좋았다. 하다가 켄마가 도망가면 남은 둘이서 스파이크나 리시브를 하는 것도 즐거웠고.
운동 신경 좋은 거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로 니케는 느는 게 하루마다 눈에 보일 정도로 무섭게 성장했다. 초등학교 때 같이 소속되어 있었던 어린이 팀에서도 니케는 단연 팀의 에이스였지만 학교 공식 팀에서 선배들과 코치의 생생한 조언을 받으며 매일 팀원들과 훈련하는 니케는 성장속도가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때로 전통 강호가 아니더라도 팀의 체계가 완전하지 않고 선수층도 불안정한 중학 배구 세계에서 한 명의 강력한 선수의 등장은 단숨에 팀을 비상시키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이름 없는 네코마 중학 여자 배구부는 니케가 입학하자마자 인터미들 도쿄 베스트8을, 다음해엔 결승까지 갔다. 네코마는 연장 끝에 석패했고 아깝게 전국대회는 가지 못했으나 주목도가 높은 도쿄 대표 결정전에서 1위 팀 공격수들보다 눈에 띄던 니케에게 결국 운명의 콜이 들어왔다.
유스 올림픽 청소년 배구 대표로.
처음으로 개최되는 유스 올림픽이었다. 8월에 올림픽이 있기 때문에 올해의 인터미들 예선까지의 경기에서 선수를 뽑아 유스 대표팀이 만들어졌다. 뭔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늘 붙어서 함께 배구공을 잡던 사람이 국가대표로 나간다는게.
첫 유스 올림픽이기 때문에 어떤 팀도 완전한 체계 속에서 만전의 상태로 출전하는 건 아닐 것이다. 관건은 아마도 빠른 시간 내에 유효한 공격 스타일을 찾고 팀워크를 갖추어 내는 것. 니케는 학교에서 전철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도쿄 키타구 아카바네의 내셔널 트레이닝센터에서 대표팀 합숙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청소년 대표 뿐 아니라 수많은 국가대표가 여기서 생활한다면서 싸인 받고 싶은 선수 없냐고 물었다. 마주치면 자기가 책임지고 싸인 받아주겠다나... 니케가 초등학교 시절 육상부를 떠나면서 코치에게 했던 호언장담이 생각보다 엄청 일찍 실현되게 생겼다. 8월, 니케는 청소년 대표로 유스 올림픽이 열리는 싱가포르로 갔다.
니케는 생일이 이른 편이라 유스 올림픽 출전 나이를 맞출 수 있었는데 그 탓에 대표팀에선 니케가 가장 어려 스타팅 멤버로 나오진 않았다. 1회전 경기에서 스타팅으로 코트에 선 윙 스파이커 에이스의 부상으로 드디어 니케가 나오게 되었는데 경기 3세트 중반 이쪽이 열세인 상황에서 출전하는 니케가 긴장하면 어쩌나 화면 너머로 지켜보는 사람까지도 손을 떨게 했다.
"쿠로, 진정 좀 해."
"하아?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지금 전 세계 중계 카메라가 니케를 잡고 있는데?? 켄마 이 상황에서도 그렇게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거야?"
"니케 나온다. 봐."
니케의 금색 눈이 경기장의 오렌지 빛 조명을 받아 유난히도 반짝였다. 중계진도 똑같은 생각인지 열세 속 교체되어 나온 어린 선수의 얼굴에 유독 초점을 가까이 잡아 화면에 담았다. 아, 저 표정. 열세 속 교체라는 부담으로 긴장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사라진다. 알고 있을까. 저 표정은 컨디션이 특히 좋은 날, 힘으로 상대를 완전히 죽여버리겠다는 생각을 할 때 짓는다. 어릴 적 어느 시합에 니케가 저 얼굴을 하고 10점 차로 이겼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친다.
"공이 깔끔하게 세터에게로 연결됩니다! 빠른 속도로 뛰어오르는 니케 선수에게 셋업을 올리는 순간! 아아아 여기서 일본이 브레이크!!!!!"
퍼억, 콰앙, 하는 소리가 상대방 코트를 울린다. 간신히 상대 팀 점수를 따라가던 일본이 니케가 코트에 들어오고 차분히 점수 차를 줄여가더니 마침내 팽팽한 힘의 균형을 깨고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득점에 성공하고 개구지게 웃으며 눈을 반짝거리는 저 얼굴은 보는 사람까지 황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 얼굴을 세계가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일본은 1회전을 통과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배구 대표팀이 1승을 따내자 언론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니케는 2회전부터 스타팅 멤버로 코트에 나왔다. 1회전에 부상을 당했던 윙 스파이커의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는 건지 1회전 때의 니케가 워낙 큰 임팩트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니케는 매 경기 신나게 날뛰었다. 저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있는 힘을 비틀어 짜내서 1점, 그 다음 1점을 이어가는 승부의 압박과 무게보다는 도쿄돔 무대에 오른 최고 인기 아이돌의 콘서트를 볼 때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야말로 축제였다. 세계인의 축제라는 말 답게 보는 사람도, 아마 틀림없이 니케 본인도 올림픽 무대를 온 마음을 다해 즐기며 1승을 거듭해갔다. '어디까지 갈까?' '설마 오늘도 이길까?' 벽을 하나씩 넘어갈 때마다 반신반의 불안과 걱정 또는 기적을 바라며 응원하던 사람들이 4강에 오르자 이젠 온 전국이 배구 대표팀을 한 마음으로 응원했다. 올림픽이란게 보통 그렇지만 드라마틱한 승리와 기대하지 못했던 선전에 전국이 내내 이 주제로 들썩이기 마련이다.
"니케 돌아오면 볼 만 하겠는데."
"광고 찍을 듯? 나이키(NIKE) 찍으면 재밌겠다. 이미 니케한테 컨택할 준비 다 했을지도."
"켄마. 넌 니케 저렇게 될 거 예상했었어?"
"아니? 당연히 예상 못했지. 유스 콜은 고등학교 때 쯤일 줄 알았는데."
"......"
금의환향. 모든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배구 대표팀에 딱 어울리는 말이었다. 처음으로 열린 유스 올림픽 역사 그 첫머리 꼭대기에 이름을 새기고 온 여자 배구 대표팀은 올림픽 후에도 연신 카메라 세례와 주목을 받았다. 특히 최연소의 나이로 부상당한 에이스를 대신하여 전 일정 내내 돋보였던 니케는 그야말로 영웅이었다. 어린 승리의 여신, 스포츠 챔피언 등등 온갖 반짝이는 수식어가 니케를 따라다녔다. 그 인기를 잘 모르는 건지 아니면 그런 것에 관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디로 또 불려가 광고를 찍고 막 귀가한 니케는 본인을 모티브로 제작된 백색에 금색 포인트가 박힌 그 브랜드 기념 운동화는 받자마자 방에 던지고 리시브 연습하자며 소꿉 친구를 불러냈다. 얼마든지. 바라던 바야.
3학년이 된 니케는 올해야말로 전국으로 가고야 말겠다고 투지를 불태웠다. 전국대회 도쿄 예선은 5월. 1학년들이 입학하고 곧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선수층이 얕은 학교는 인터미들에서는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실력자들이 많이 들어온 네코마 여자 배구부는 올해가 전무후무 최고의 기회라고 의기투합했다. 힘과 스피드 전부 갖춘 주장 니케를 중심으로 안정적인 리시브를 책임지는 3학년, 유독 큰 키로 든든한 블로킹을 완성시킨 2학년, 그리고 재능있는 1학년까지. 네코마의 역사를 새로 쓰는 그 현장을 절대 놓칠 수 없었기에 수많은 네코마중 학생들이 도쿄 스미다구 체육관에 모였다. 운명의 도쿄 대표 결승전, 네코마 여자 배구부의 전국행을 두 눈으로 보기 위해. 원래 이 대회 이렇게 중계진이 많이 들어왔던가? 온 사방에 카메라가 깔린 것이 꼭 도쿄 대표 결정전이 아니라 전국대회 결승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삐이이이이이익
가자, 니케. 염원해온 전국으로.
"아 여기서 니케 선수의 서브 차례가 돌아옵니다."
"네, 현재 승리의 바람이 네코마중 쪽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여기서 네코마가 득점을 한다면 상대 팀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겠는데요."
엎치락뒤치락 하면서도 네코마는 차츰 난투극을 제압해갔다. 최고다. 이때까지 봐왔던 니케네 배구부 경기 중에 오늘이 가히 최고라고 단언할 수 있다. 관중석에서도 느껴졌다. 치열하게 치고받고 있지만 점점 이쪽이 힘의 우위를 점해가고 있는 것을. 전국이 코앞이다.
"그렇죠. 경기 종반 니케 선수의 서브로 시작하는 이 1점은 이번 대회 전국으로 향하는 팀이 누가 될 것인지 결정짓는 그 표지가 될 것이 틀림없어 보이네요. 말씀드리는 순간! 휘슬 소리에 니케 선수가 달려나갑니..."
전국까지 이제 정말로 딱 한 걸음만을......
타앙. 탕 탕―...
"니케!!!!!"
하늘로 떠오른 공이 주인을 잃고 그대로 경기장 바닥에 맥없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니케의 이름을 비명처럼 외쳤다. 이번 대회의 승기를 잡는 표지라던 그 1점을 치는 일은 없었다. 니케는 체육관 바닥에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니케의 의식이 돌아온 건 이틀 후였다.
니케가 깨어났단 소식에 병실로 여자 배구부 부주장이 달려왔다. 시상식에서 니케를 대신해 받아온 베스트 스파이커 상패를 차라리 푸를 정도로 새하얀 니케의 손에 안겨주며. 우리 전국은? 물끄러미 상패를 바라보다 천천히 떼는 니케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부주장은 우린 너 죽을까봐 잠도 못 잤는데 너는 일어나자마자 하는 말이 전국이냐며 울듯이 나무랐다.
"미안해......"
미안해, 나 때문에, 다 왔는데, 나 때문에, 너희들까지, 미안해, 미안해......
대회 최고의 스파이커였다는 증명인 그 상패에 얼굴을 묻고 미안하단 말을 연신 내뱉는 니케의 눈물이 반짝거리는 베스트 스파이커 상패에 흘러 떨어졌다. 당연히 최고의 스파이커가 아니라 최고의 팀이 되고 싶었다. 부주장은 당치도 않는 소리 말라며 우리에게 이게 최고의 팀이라는 증명과 뭐가 다르냐고 한참을 니케를 달래다 돌아갔다. 니케 잘 보고 있어 달라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뉴스에서는 니케에 관해 시끄럽게도 떠들었다. 온 전국에서 어린 스포츠 스타가 우승을 눈 앞에 두고 의식을 잃고 쓰러진 일을 두고 뭐 자극적인 가십거리라도 생겼다는 듯 너 나 할 것 없이 대서특필했다. 날개 꺾인 승리의 여신 어쩌구 하는 뉴스 타이틀을 보자마자 진절머리가 나 휴대폰을 꺼버렸다. 전국적으로 대 유명세를 얻고 인기를 끌었던 만큼 더 난리가 났다. 스타성이 이렇게 역풍으로 돌아오는구나 하는 걸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쿠로!"
"어? 어, 왜? 어디 아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몇 번 불렀는데. 거기 있는 거울 좀."
거울? 근데 지금 거울을 줘도 괜찮은 건가? 충격 받아서 갑자기 안 좋아지면 어떡하지? 일단 의사한테 먼저 물어봐야 하나? 지금 컨디션이 괜찮은 거 맞나? 잘못하면...
"자, 거울."
"켄마!!"
"쿠로, 진정 좀 해. 니케 괜찮아."
안절부절 못하는 쿠로오가 머뭇거리는 틈에 켄마가 거울을 건네줬다. 켄마는 본 적이 있다. 저 모습은... 켄마와 니케가 처음 만나던 날의 모습이었다. 켄마도 켄마의 엄마도 남자 아이라고 착각했던.
"딱히 안 이상하네. 이 말 옛날에 켄마가 그대로 했던 것 같은데. 뻥 친 거 아니었구나."
"거 봐."
켄마가 살짝 웃으면서 쿠로오 쪽을 봤다. 거 봐, 내가 안 이상하다고 했지, 가 아니라 거 봐, 내가 니케 괜찮을 거라 했지. 하는 의미였나 보다. 그제서야 그때까지도 심장이 진정이 안 되는 것 같던 쿠로오가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배구부 3학년은 전국대회(인터미들) 후엔 두 가지로 길이 나뉜다. 배구부를 은퇴하고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쪽, 그리고 계속 배구부에 남는 쪽. 보통 고등학교에서도 선수를 계속 할 생각이라면 중학교 졸업 때까지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학교 수업과 방과 후 훈련을 이어간다. 쿠로오도 니케도 고를 것도 없이 후자였다. 니케는 자주 재활을 다녀야 해서 병원에 갔다 온다고 이전처럼 매일같이 연습을 하지는 못한다지만... 아니 그것보다는 절대 무리한 활동을 하지 말라는 병원의 처방이 니케를 더 답답하게 하는 것 같았다. 배구부 훈련이 끝난 저녁엔 보통 니케와 동네 근처에서 가볍게 걷는데(당연히 켄마는 나오지 않는다) 니케는 병원이 말하는 '무리'는 무슨 강아지 산책하는 것 같은 정도를 '무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너무하네~ 네코마 에이스를 뭘로 보고~ 라고 히히덕 맞장구를 치며 웃었지만 확실히 니케는 전이랑은 달랐다. 하쿠신(霸九心)이라는 성처럼 꼭 아홉 명 분의 체력을 가지기라도 한 듯 지치는 법을 모르는 니케를 두고 언론에서도 자주 아홉의 심장이라는 표현으로 그 무한 체력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3년 내내 다녔던 이 길도 이따금 속도를 확 줄여 숨을 고르지 않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겠지만...
"쿠로, 잠깐만 리시브 연습 하다 들어가자."
아니, 아닐 수도......
3
어김없이 쿠로오와 니케는 먼저 고등학교로 떠났다. 도쿄 도립 네코마 고등학교. 전철을 타고 등교하는 거리의, 예전에는 꽤 강했던 배구부가 있는 학교다. 둘이 먼저 떠나고 혼자 남겨진 이 1년 간의 학교는 늘 이상하게 조용하다.
쿠로오는 배구부 1학년 동기로 전국제패를 외치는 웬 당돌한 놈들이 들어왔다고 기가 막혀했다. 신나보였다. 쿠로오는 틀림없이 중학교 때도 쉼 없이 노력했었다. 여기서 더 했다간 죽을거야 란 생각이 들었을 때 쿠로오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뛰곤 했으니까. 안 자고 밤을 새서 게임을 하다 걸리면 혼나기 때문에 두 시에 일어나서 게임을 하는데 다섯 시에 로드워크를 하는 쿠로오에게 그 상황을 걸렸으니까 얼마나 쿠로오가 노력해왔는지 알만했다. 그런 쿠로오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니까 마치 니케가 중학교 입학 후 그랬던 것처럼 집요하고 재능있는 동기들과 노련한 선배들 사이에서 성큼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벌써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주장 마크가 그어진 네코마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목표는 전국이라고 외치는 쿠로오가.
니케는 불안불안하긴 했지만 마찬가지로 여자 배구부로 가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재활을 계속 다녀야 하긴 했어도 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조금 예전 기량을 못 낸다고 해도 이미 올라간 레벨이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배구부를 하는 것에 아무 문제도 없는 건 사실이었다. 니케 자체도, 니케의 배구도 워낙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니 금방 팀을 강하게 할 거란 건 의심의 여지도 없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며칠 전에 쿠로오가 조용히 물었다. 지금 니케 어떻게 보고 있냐고. 쿠로오가 이런 식으로 물어오는 건 이미 속으로 오만가지를 생각하고 혼자 백만가지 쯤 걱정한 후에도 답이 떠오르지 않아 묻는 거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안 괜찮은 것 같다고. 분명 재활을 꾸준히 하고 있고 그 덕에 조금씩 회복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회복이 아니라 도약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전처럼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만큼의 전력을 그대로 쏟을 수 없는 이 상황은 새장에 갇힌 느낌일 거라고. 아마 그래서 더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 같다고. 체력의 한계의 한계까지 연습을 한다거나 하는. 그렇게 하고도 스스로가 예전과 다른 것이 느껴질 테니 더 스트레스를 받을 거라고.
쿠로오의 표정이 어둡다.
니케의 주변 사람들 전부 마찬가지였지만 니케가 중학교 3학년 도쿄 결승전 중에 쓰러지고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때 쿠로오는 정말 하루종일 뭘 먹지도 않고 잠도 못 자고 니케를 걱정했다. 그러다 쿠로오 쓰러지는 거까지 볼까봐 옆에서 계속 바나나며 에너지바며 그런 걸 까서 입에 넣어줬다. 넌 앞으로 나한테 밥 안 챙겨 먹는단 소리는 하지 마라.
니케가 눈을 뜨자마자 전국대회 타령을 해서 결승전 도중 앰뷸런스가 니케를 응급실로 데려가고 긴 수술시간 내내, 그리고 의식없이 누워있었던 그때 상황이 얼마나 무거웠는지는 묻혀버렸지만 정말 니케는 위험했다. 그대로 은퇴해도 이상할 게 없었는데 니케가 재활을 해서라도 코트에 다시 서려고 했을 때 솔직히 진짜 정신나갔냐고 말하고 싶었다. 말도 안 된다고. 눈 감고 있어서 그때 상황을 몰라 심각성이 와닿지 않는 거냐고.
' 몰라. 이상없대! '
병원에서 그렇게 머리를 다 밀 정도의 검사를 하고도 무슨 일인지 묻는 말에 이상없다는 짧고 뭉뚱그린 결과 한마디로 답을 하는 처음 만났던 시절 니케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아 짜증이 났다. 그런데 이 시간에 웬 사람들이 저렇게 바글바글 모여있지?
저 앞 큰길을 건너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곧 집이다. 배구부 훈련이 끝나고 하교하는 길, 분명 평소와 같은 시간의 같은 풍경을 지나는데 쎄한 이질감이 본능적인 불안을 일으켜 신경을 곤두세운다. 옆을 급하게 지나쳐가는 사이렌 소리. 구급차는 저 앞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큰길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린 사람 둘이 구급차에 데리고 올라가는 사람은...
빨간색 체육복 빨간색 운동부 저지.
니케다.
쿠로오가 병원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아 배구부 연습이 끝나고 문자 메세지를 확인하자마자 학교에서 바로 여기로 온 모양이다.
"켄마."
"막 수술 끝났고 지금 저쪽 병실에 있어. 금방 깰거래. 저번처럼 심각한 건 아니어서."
묻기 전에 빠르게 상황을 브리핑했다. 그 말에 그제야 힘이 풀렸는지 주르륵 미끄러져 주저앉는다. 꼴을 보니 숨은 쉬고 뛰어왔는지 모르겠다.
고교 전국대회인 인터하이의 도쿄 예선은 6월 초다. 아무리 못해도 최소 한 달 이상은 절대 안정을 취할 것을 신신당부한 병원 측의 조치에 따라 니케는 인터하이에 참가하지 못하게 됐다. 대신 병원과 재활센터를 다니는 일이 더 잦아졌다. 중3 때보다 상태가 악화되어 그런 건 아니고 이번 일을 통해서 확실히 회복할 때까지는 선수활동보다는 재활과 회복에 더 시간을 쏟는 것이 장기적으로도, 그리고 또 예기치 못한 사고가 생기는 걸 막는다는 이유로도 더 적절하다는 병원의 판단 때문이다. 니케는 배구부에서 나왔고 2학년으로 진급하는 대신 출석 일수가 부족해 1학년으로 유급 재입학했다.
홀로 2학년이 된 쿠로오의 어깨가 무거워 보이는 건 기분 탓 만은 아닌 것 같다.
직접 입학해서 본 네코마 남자 배구부의 모습은... 시끄럽고 불편했다. 특히 시끄러운 1학년의 한 동기는 입부 첫날 체육관에서 쿠로오와 얘기하고 있는 니케를 보자
'이것이 고교!'
라고 이상한 목소리로 괴성을 지르질 않나, 다음날엔
'오늘 매니저님은 안 오셨나요...?'
하고 쭈뼛거리는 말에 쿠로오가 '우리 매니저 없는데?' 라고 말하자
'그럼 어제 「그분」은! 쿠로오 상과 얘기한 분은!' 하고 다급히 외쳤는데 쿠로오가 히죽거리며 '걔 어제 내가 두고 온 물병 갖다 주러 온건데' 라 말하니까 정말이지 들어주기 힘든 소리로 절규했다. 니케랑 체육관에서 모른 척 해야겠다. 저 1학년 동기한테 니케랑 아는 사이란 걸 들키면, 그것도 어릴 때부터 친구였단 걸 알게 되면 귀찮게 굴 것이 눈에 선해 몸서리가 쳐졌다. 뭐만 하면 근성, 근성 하고 앵무새처럼 외는 것도.
니케는 어느 부도 들지 않았다.
어떤 날은 종일 잠만 자거나, 어떤 날은 종일 게임만 하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도서관에서 책을 몇 권이나 빌려서 책상에 쌓아두더니 첫 번째 책도 채 다 못 읽고 반납하기도 했고, 언제는 또 학교에 오지 않아서 보니 체육관에서 하루종일 연습만 하고 있기도 했다. 또 한번은 어디서 날티나게 생긴 친구들을 잔뜩 만든 건지 하루종일 그 애들과 도쿄 번화가에서 놀거나. 방과 후에는 재활이 있어서 병원을 가거나, 그렇지 않은 날에는 이따금 체육관 2층에 앉아 한참을 가만히 배구부 훈련을 보다 가기도 했다.
니케는 밝은 성격은 맞다. 처음 만났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도 딱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나 어색한 상황에 낯을 가리지도 않고 주변인들에게는 늘상 친절하고 싹싹했지만 일부러 인간관계를 만들지는 않는다. 생각보다 훨씬 최소한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우연히, 또는 먼저 다가와 인연이 된 사람과만 한정적으로 어울렸다. 그렇기 때문에 니케는 유급 입학한 1학년들 사이에서 적당히 잘 어울리긴 해도 원체 유명한 사람이라 거리감이 생기다 보니 선배인 니케에게 쉽게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고 니케도 굳이 마음을 열고 먼저 다가가지도 않았다. 종종 배구부에 찾아와서도 원래 같이 입학했던 쿠로오 학년과 더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는 듯 했다. 작년 1학년 때 니케와 같은 반이었던 사람이 하나 있기도 하고.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성격의 리베로인데 입학 첫날 니케와 같은 반으로 만났을 때 바로 말을 걸어왔다고 했다. 싱가포르에서 경기하는 거 티비로 봤다면서. 둘이 성격이 비슷해서 금방 친해졌다는데 이 사람과 틈만 나면 으르렁거리는 쿠로오가 니케네 반에 찾아오자 넌 뭔데 다른 반 놈이 니케를 아는거냐고 또 티격거린 모양이었다. 단순히 싸울 소재가 필요한 거라 둘이 그러고 있는 걸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처님 같은 인상을 한 나머지 2학년 배구부 한명도 매번 그걸 인자한 얼굴로 보기만 하고 있고 니케는 더 화끈하게 싸워보라며 부추기기나 하니 말 다했다. 승리의 여신이 아니라 순 전쟁의 여신이다.
1학년이 거의 끝나갈 때 쯤 니케는 간단히 짐을 챙겼다. 그동안의 재활 프로그램이 일단 공식적으론 전부 끝났기 때문에 도쿄 다른 지역에 있는 선수단 스포츠 의학 센터에서 선수 생활이 무리없이 가능한 상태가 된 건지, 앞으로 더 재활을 해야 하는지 그런 등등의 검사를 종합적으로 받게 될 거라 했다. 즉, 경우에 따라선 배구를 완전히 그만둬야 할 수도 있는... 그런 결과를 마주할 가능성도 각오해야 하는 자리인 거다. 전 세계 중계 카메라 가운데 열세인 상황 속에 코트 위로 나왔던 올림픽 첫 무대에서도 안 하던 긴장을 여기서 하고 있다.
"니케~ 표정이 어디 사람 두엇은 묻고 온 사람 같다~"
"시끄러워."
"다음은 쿠로가 묻히겠네."
아침 등교길, 평소 셋이 함께 타는 오른쪽 방향 열차가 아닌 왼쪽 방향 열차 개찰구 앞에 서 있는 니케를 배웅했다. 평소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인데 서로 반대 방향의 열차를 타게 되는 역의 공기는 낯설다. 그렇기 때문일 거다. 곧장 열차를 타러 가지 않고 니케에게 굳이 한 마디 더 덧붙이는 쿠로오도. 뛰어서 제일 앞 플랫폼까지 가는 니케를 지켜보다 학교로 가는 열차의 승강장으로 향했다.
"발이 안 떨어지네."
"나도."
"넌 항상 안 떨어졌잖아."
"쿠로가 의욕적인거지."
왼쪽 승강장으로 열차를 타고 떠난 그 다다음날, 배구부 연습이 끝난 느즈막한 저녁, 돌아왔다는 니케의 문자가 왔다. 지금 막 역에 도착했다고. 마침 연습이 끝나 셋이서 같이 집에 가자고 했는데 네코마 중학교에 들렀다 갈 거니까 먼저 집에 가라는 답이 왔다.
'제 --회 중학 종합 체육 대회 도쿄 여자 배구 경기'
'베스트 스파이커'
'하쿠신 니케,'
'위 학생은'
'본 대회에서 우수한 경기력으로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바,'
'이 상을 수여합니다'
유리 진열장 높은 곳에서 상패가 노을에 반짝거렸다.
니케가 중학교 시절 경기 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병실로 상패를 전해주러 왔던 여자 배구부 부주장이 돌아간 후 그걸 집어 던지려던 것을 쿠로오와 잠깐 간식거리를 사러 나갔다가 병실로 들어오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막은 일이 있었다. 쿠로오가 거의 몸을 날려 니케의 팔을 붙잡았는데 상패가 니케의 손에서 튕겨나간 걸 간신히 내가 잡았었던. 나, 나...이스 리시브 켄마, 하고 깜짝 놀란 고양이 같은 얼굴로 말을 더듬던 쿠로오의 목소리까지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니케는 끝끝내 필요 없다고 해서 이렇게 학교에 영원히 두게 된 것이다.
상패를 보는 니케의 얼굴에도 노을이 드리워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슬픔도 분노도 다 두고 온 조용한 얼굴로 천천히 글자 하나 하나 곱씹듯 바라보는 걸 쿠로오와 한참을 지켜봤다.
4
"니케, 매니저 안 해볼래?"
알고 있다. 선수였던 사람한테 매니저 안 해보겠냐고 하는 말이 어떤 의미로 와닿을지. 알고 있지만, 잘 알지만...
슈퍼마켓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상체를 거의 다 집어넣고 아이스크림을 뒤적거리던 니케의 손이 순간 멈칫 하고 멈춘다. 찌르르 하는 밤 벌레 소리가 한층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뭔가, 뭔가 좀 더 제대로 설명을 하려는데 이런 저런 말들이 머릿속에서 한번에 튀어나와 자기들끼리 복잡하게 꼬였다가 일순 새하얘졌다. 그, 음... 그게... 하는 낱말조차 되지 못한 안쓰러운 글자 토막들만 내뱉으며. 멈췄던 손이 다시 아이스크림을 뒤적거린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아이스크림 냉장고에서 들려온다.
"방금 좀 주장 같았어."
"주장 맞을 걸요~?"
그 장난스런 목소리에 덩달아 히죽거렸다. 며칠 전 3학년 선배들이 떠남과 동시에 네코마 배구부 주장 자리를 넘겨 받았다.
니케는 거침없고 저돌적인 편이지만 가끔씩 오싹할 정도로 정확히 속마음을 읽어서 어디서 마음이 들킨 건가 싶을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고마워, 쿠로오."
이럴 때. 드물게 장난기 하나 없는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 오싹해져서 목 뒤를 손으로 두어 번 쓸어내렸다.
"넌 이 맛 먹지? 특별히 누나가 산다. 네코마 주장 기념으로."
"귀하신 후배님이 쏘는 건데 여부가 있겠습니까."
니케가 1학년을 두 번 다녔기 때문에 학년은 하나 아랜데 생일은 4월이라 동 입학 년도에선 제일 빠른 생일이어서 작년부터는 (자칭)누나이자 후배이기도 한 그런 형태가 됐다. 항상 가장 먼저 가장 앞에서 달리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아직도 문득 어색하고 낯선 기분이 든다. 늘 그 등을 보고 따라갔는데 이제 아직 아무도 지나본 적 없는 곳을 먼저 밟으며 앞서 달려야 한다는 사실에. 비단 나이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니케가 콜라맛과 소다맛 아삭아삭바를 하나씩 들고 계산대에서 돌아온다.
배구부 매니저를 하면 재밌을 거란 생각은 몇 번 했다고 했다. 한 학년의 거리만큼 멀찍이 멀어져버린 기존 동기들과, 서로 완전히 거리감을 없애긴 어려운 유급되어 같은 학년이 된 후배들 사이에서, 입학했던 해에 같은 반을 해서 친해졌던 야쿠를 포함한 배구부 3학년은 갈 곳 없는 마음이 머물 수 있는 몇 없는 사람이었고 작년에 배구부를 들락거리며 안면을 튼 배구부 2학년들도 좋아한다고 그랬다. 2학년 중에 네코마 중학교를 다니는 여동생이 있는 놈이 있기도 하고.
"아 맞아 그 굉장한 친구... 혼자서 네코마 응원단을 이끄는 중학생..."
"내 팬이래. 전에 너네 연습경기 구경하러 왔을 때 나랑 마주쳤는데 그때 그러더라고. 내 경기 중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봤다면서. 어지간한 선수들 이상으로 분석도 예리하고 아는 것도 많아서 깜짝 놀랐었는데. 귀여웠지~ 동생 있으면 무슨 기분일까."
그런데도 선뜻 매니저는 하지 못하겠더라고 한다. 이미 알고 있는데, 이미 받아들였는데, 어쩐지 매니저를 하면 덤덤해진 사실들이 다시금 실감날 것 같다고. 그게 두렵다고. 좀 한심한가? 아니. 둘 다 손에 하나씩 든 아삭아삭바를 베어 먹으며 말을 주고받았다. 매니저는 아니라도 자주 도와주겠다고 했다. 햇병아리 새 주장이 불안하니 어쩔 수 없다나. 니케의 다정은 아주 옛날부터 항상 이렇게 별 것 아니라는 듯한 포장을 하고 있다. 그걸 받는 사람조차 자기도 모르는 어느새 자신이 애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본인의 친절과 애정을 평범하게 느끼기를 무언으로 요구한다. 거짓말. 무언으로 치는 거짓말이다. 본인이 그런 다정을 베푸는 사람 세상에 한 손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없으면서. 이렇게 자기만 무조건적으로 주고 싶어할 때마다 불길함 내지 탐탁찮음 그 비슷한 감정이 밀려온다. 필사적인 모습이나 구질구질한 모습, 혹은 질투나 응석이나 초조함 같은 순수하고 인간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니케가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어 보여서. 최근 1,2년 사이에 이걸 더 확실히 알게 됐다. 누구한테 고민을 털어놓고 싶기도 했으나 말로 설명도 하기 어려운 얘기라 혼자 머리를 싸맸다. 친구 둘 있는 게 어째 둘 다 일반적인 인간 같지는 않은 애들이라니 참 영문 모를 일이다.
니케는 아삭아삭바를 먹으며 했던 말대로 여러가지로 계속 도와줬다. 단체 로드워크를 할 때 열의 가장 뒤에서 달리며 처지는 사람의 페이스에 맞춰 낙오를 막아준다던가, 기초 플레이에 미숙한 1학년 부원의 연습을 도와준다거나. 밋밋하고 눈에 띄지 않지만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루한 한걸음 한걸음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의 서포트를 기꺼이 자처했다. 자기는 부원이 아니라면서 합숙 같은 것에는 따라오지 않지만. 미야기로 5월 골든위크 합숙을 떠나며 1학년들이 많이 아쉬워했다. 니케 선배도 그냥 같이 가요. 그러면 니케는 개구지게 웃으면서 말한다. 돌아와서 레벨업한 모습으로 자길 깜짝 놀래켜 보라고. 청춘 성장 스포츠물 한 편 기대하고 있겠다면서. 하여간 말은 잘한다.
미야기 합숙은 지역 여러 고등학교와 연습 경기를 하고 합숙 마지막 날 카라스노 고교와 만나는 일정이다. 카라스노는 네코마와 오랜 인연이 있는 학교라고 했다. 작년 선배들이 은퇴하던 무렵 네코마 배구부에 복귀한 네코마타 감독과 학창시절에는 선수로서, 이후에는 각 학교 배구부의 감독으로서 수십 년의 라이벌인 우카이 감독이 있는 학교. 건강이 나빠져 은퇴했던 우카이 영감의 손자가 이번에 새로 카라스노의 코치가 되었다면서 네코마타 감독님은 기대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하셨다. 두 학교의 경기는 고양이vs까마귀의 대결로, '쓰레기장의 결전'이라고 부른다고. 하지만 한 번도 공식전에서 만난 적은 없다고 한다. 네코마는 도쿄, 카라스노는 미야기. 각 지역에서의 대표가 되어야 하며 전국대회에서도 두 학교의 대진표가 만날 때까지 단 한 번의 패배도 있어선 안 된다. 두 학교가 모두 최고 전성기였던 때에도 네코마와 카라스노가 전국대회에서 붙지는 못했다고.
'그럼 네트를 낮추면 되지. 처음에는 우선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느끼는 게 좋지 않을까.'
'좋아서 하는 일일수록 빨리 배운다, 그런 얘기지.'
켄마, 니케와 셋이서 처음 배구를 했던 그 때, 토요일의 체육관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어른이자 네코마 배구부의 감독. 네코마 인연의 라이벌이라는 카라스노에 관해 설명하는 네코마타 감독님을 보며 오래된 그 때를 떠올렸다. 언제까지 배구를 하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고교 마지막 그 끝이 어떤 형태였으면 좋겠다고 막연하게나마 그려본다. '전국'이란 말이 갖는 무게를 새삼스레 느끼며.
카라스노와의 시합을 마지막으로 합숙을 마치고 도쿄로 돌아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네 슈퍼의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상체를 깊게 숙여 뒤적이는데 켄마가 뒤에서 말을 꺼냈다. 그거 아냐고. 뭐를? 냉장고 안을 계속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니케가 왜 이렇게 뒤적거렸는지 알겠네. 다들 콜라맛부터 앞다퉈 가져가는 통에 영 하나도 보이질 않는다.
"쿠로 니케랑 성격 똑같다고."
예상 못한 주제에 뒤를 돌아 켄마를 봤다. 휴대폰 게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켄마가 말을 이어갔다. 니케한테 와 달라고 말하지 않는 거, 니케가 원하지 않는데 억지로 책임감에 하게 될까봐 그러는거 아니냐고.
정곡을 찔려서 말문이 막혀 그저 켄마를 쳐다보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니케가 강하게 바라는 게 있으면 좋겠다고, 간절해지고 매달리고 필사적이었으면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면 그렇게 니케를 배려한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강하게 끌어 당기라고. 한 팀이 되어 달라고. 옛날에 나랑 니케를 공터로 불러냈던 것처럼. 니케가 안 올 것 같냐고. 쿠로가 부르는 말에.
그때도, 지금도.
"......"
켄마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지? 누구에게 말할 수 없어서 혼자서만 골백번도 넘게 고민했었다.
"...어떻게 알았어?"
"뭐를?"
"니케가 그렇다는 거랑... 내가 그걸 걱정했다는 거랑... 왜 와 달라고 말하지 않았던 건지랑..."
"그야 당연히 나도 이것저것 생각하고 하니까... 나라고 아예 남들한테 마음을 안 쓰는 건 아니라고. 아니 왜 이렇게 놀라? 내가 남을 위하면 이상해?"
"아니, 아닙니다. 이거 하나씩 먹자. 콜라맛 희귀한 거야. 내가 산다."
서둘러 계산을 하고 뚱한 표정의 켄마에게 아삭아삭바를 건넸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여름으로 페이지를 빠르게 불어 넘긴다. 계절이 학교 여기저기를 녹색으로 물들였다. 교실도, 운동장도, 이 곳 3층 복도도. 눈앞에 선 이의 눈동자가 녹색이 아니었던가 착각이 들 정도로.
"니케,"
드물게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7월 초에 후쿠로다니에서 하는 합숙 안 올래? 같이 가자."
담담한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2주 후에 신젠에서 하는 여름방학 합숙도... 너가 필요해."
'니케, 배구하자! 너가 필요해.'
'이렇게 뛰어서 이렇게 치는 게 스파이크야! 내가 리시브 할테니까 스파이크 안 쳐볼래?'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사소하고 작은 기억의 조각이지만, 떠올리기만 해도 두근거려서 다른 복잡하고 이성적인 생각들이 전부 옅어지고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발을 딛게 되는.
"같이 가자. 꼭 정식으로 입부 안 해도 상관 없어. 너가 필요해."
그래서 지금, 여기가 아니면 안 될 것 같다는 강한 힘을 느낄 때. 쿠로오가 부르고 있다.
"그래."
안 그래도 작은 쿠로오의 동공이 더 작아지는 게 보였다. 그 얼빠진 표정에 한참을 웃었다.
쿠로오를 3학년 층으로 올려보내고 혼자 학생회실로 향했다. 학생회실 한 켠에는 항상 입부 신청서 뭉치가 있다. 학기가 시작한지 이미 몇 달이 지난 초여름인 까닭에 학생들의 손길이 닿은지 제법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듯 종이가 약간 울어 구깃해진 신청서 한 장을 집어 그 자리에서 칸을 채웠다. '남자 배구부, 하쿠신 니케. 입부 신청 수리를 요청합니다.' 신청서를 학생회 서류함에 넣으며 예전 생각이 났다. 배구를 하고 싶다고 육상부를 나가던 일이. 그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한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기대되어 심장이 간지럽고 설레던. 낡고 오래된 그 감정이 이상하게 이 순간 떠오른다.
오후 수업까지 모두 끝난 시각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붉은색 배구부 체육복 바지, 붉은색 배구부 저지. 네코마 여자 배구부와 남자 배구부의 체육복 디자인은 동일하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여자 배구부를 떠나고도 지금까지 습관처럼 입고 다닌 옷이었다. 부원들이 아직 오지 않은 이른 시간이었는데 네코마타 감독이 먼저 와있었다. 아까 입부 신청서 내고 왔습니다. 인사하자마자 입부 소식을 가장 먼저 전했다.
"그래, 그 '순간'은 발견했느냐?"
빙그레 웃으며 묻는 감독의 그 질문에 이른 봄의 기억이 겹친다.
"쿠로오가 매니저 안 해보겠냐고 했어요."
다들 제각기 연습에 바쁜 시간 코트 뒤쪽에서 부원들을 지켜보며 네코마타 감독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쿠로오가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알고 있어요. 못 할 이유가 없었는데, 오히려 제겐 하면 좋을 이유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어쩐지 하겠다고 대답을 못 했어요."
배구화가 체육관 바닥에 스쳐 끽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이스 서브 하나 더!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감독은 이쪽을 봤다가 다시 코트 먼 곳을 바라보며 입을 뗐다.
"니케, 배구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느냐?"
"공을 받아서... 치는...?"
얼떨결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에 네코마타 감독이 허허 하고 웃었다.
"그래, 맞다. 서브에서 리시브로, 리시버는 세터로, 세터는 스파이커에게 '연결하는' 운동이지."
강한 스파이크를 때리는 쪽이 이기는 게 아니다. 공을 바닥에 떨어뜨린 쪽이 지는 거다. 네코마타 감독이 네코마에 복귀했던 올 초 했던 말이다.
"'연결'이란 건 반드시 A패스일 필요는 없어. 코트 안, 때론 코트 밖으로까지 몸을 날려 올린 B패스, C패스로 경기가 계속되지. 그렇게 이어진 공은 동료들이 그 '다음'으로 연결해줄 거다."
심지와 세월이 느껴지는 감독의 단단한 목소리가 네코마의 붉은 현수막을 떠올리게 한다. '이어라(繋げ).'
"아직 공은 코트에 떨어지지 않았다. 니케, 너의 그 무엇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
"......"
"서브에서도 공격에서도 노려지는 건 에이스의 숙명이지. 에이스가 강할수록 더더욱 에이스를 견제해 공격 수단을 좁히고 싶어하거든. 그래서 노련한 에이스는 누구보다도 리시브에 강하기 마련이야."
다시 이쪽을 보는 감독의 주름 진 얼굴에 설렘이 번지는 것 같다고 느꼈다.
"니케, 훌륭한 에이스인 너는 그 순간이 오면 분명 알 수 있을 거다. 이 위치 이 타이밍. 여기가 '다음'으로 이어질 리시브의 순간이구나 하고."
'나이스 리시브 니케!'
어린 날 토요일의 체육관에서 올린 서툰 리시브에 손을 마주치며 외치던 팀원들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래, 그 '순간'은 발견했느냐?"
이 몇 년 이렇게 마음이 가벼웠던 적이 또 있었을까.
"네, 리시브야말로 네코마의 특기니까요."
후쿠로다니는 같은 도쿄 지구의 학교라 가는데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짐을 체크하고 다같이 합숙 훈련길에 올랐다.
"니케 선배, 가방 안 무거워요? 제가 들게요!"
"안 무거워. 그리고 나 힘 세니까."
"괜히 뽑힌거 아니라고 유스 올림픽 대표~"
"니케 선배가 가니까 우리도 매니저 생긴 거 같아!"
"사실 체감상으로는 이미 한 팀 같은데 그냥 하면 안 돼요? 네코마 배구부 매니저!"
"니케는 뭔가 매니저도 매니저지만 그런 거지... 네코마 승리의 여신."
"오 그거 괜찮은데요! 강호교 같아요."
"왜들 이래? 우리 강호 맞아."
쉴 새 없이 떠드는 부원들의 떠들석하고 높은 텐션에 덩달아 들뜨는 것 같았다. 정식으로 입부 신청서를 쓰고 매니저가 됐단 사실은 우선 감독님과 둘만 알기로 했다. 나중에 주장인 쿠로오에게 말하고, 나머지 부원들에게도 천천히 말하겠다고.
여름이 되면 네코마 배구부는 도쿄의 후쿠로다니, 신젠, 우부가와 고교와 합동 합숙을 하며 매일 연습 경기를 한다. 이번엔 네코마타 감독님이 초대한 카라스노도 함께 하기로 해서 총 다섯 학교가 모이게 됐다. 올해의 여름 합숙은 오늘 가는 후쿠로다니에서의 1박 2일, 그리고 2주 후 신젠에서 하는 일주일의 장기 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춘계 전국 고교 배구 선수권 대회' 전의 마지막 합숙이기 때문에 이 합숙에서 수십 번의 연습 경기를 통해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약점을 찾아내야 춘계 전국으로 가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부활동 자체도 그렇고 합숙도, 타학교와 하는 시합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온몸으로 새로운 자극이 넘치도록 들어오는 감각,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감각이 깨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선수로 뛰는 게 아니더라도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했던 배구는 이전과 다른 형태로 돌아온 코트 위에서도 변함없이 즐거움이었다. 전국 5대 에이스가 있는 후쿠로다니와의 경기도, 우리와 '인연의 라이벌'이라는 카라스노와의 경기도 전부. 후쿠로다니 합숙, 그리고 이어진 신젠 장기 합숙 기간 동안 다른 학교의 매니저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는데 특히 카라스노에 중학교 때 육상 허들을 한 동갑인 매니저가 있어서 서로 신기해했다.
그날의 연습 경기 일정이 모두 끝난 이후 저녁부터는 자유시간인데 보통 이 시간에는 쿠로오, 또는 3학년 리베로인 야쿠와 함께 1학년의 리시브 연습을 맡는다. 키도 크고 반응 속도도 굉장히 빠르지만 고등학교에 올라와 배구를 시작해 기초 플레이는 완전히 초짜인 네코마 신입이 쿠로오와 야쿠의 맹훈련에 영혼까지 갈리는 그 현장에서 밤 늦게까지 함께한다.
"하이바아아아!!! 에이스가 되겠다며!! 리시브도 못하는 놈이 어떻게 에이스가 되냐!! 당장 일어나!!"
야쿠의 벼락 같은 호통이 하이바를 꿰뚫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꿈틀거리며 일어난 하이바가 한탄처럼 중얼거렸다.
"야쿠 선배는 리베로고 쿠로오 선배는 주장이니까 그렇다 쳐도 니케 선배는 티비에서 보던 거랑 이미지가 많이 다르네요..."
"나? 무슨 이미지였길래."
"그야 당연히 그거죠. 강력하고 통쾌한 스파이크! 눈으로 따라가기도 벅찬 화려한 공격! 아 나도 저런 필살기 쓰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런데 네코마 와서 직접 보니까 필살기는 무슨... 리시브를 제일 최우선으로 여기는 게 의외였어요."
"'그래서'지. 쿠로오, 니케 배구 언제부터 했댔지?"
"내가 도쿄 이사왔던 해니까... 8살. 팀 들어간 건 9살."
"기억력 좋네 쿠로... 그게 그렇게 바로 떠오르나..."
"늘상 노려졌을걸. 화려하고 돋보일수록 상대팀에서 취할 수 있는 첫번째 작전이 그 사람이 무릎을 쓰게 리시브를 받도록 해서 공격에 나서는 것도 견제하고 체력적으로도 부하를 거는 거니까. 돋보이는 사람일수록 리시브를 잘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어. 여기 다른 학교들도 종횡무진 날뛰는 카라스노의 10번을 그런 식으로 공격하잖아?"
"니케 거의 선수로 뛴 모든 시절에 공격의 핵심 윙 스파이커였으니까 말이야~ 다들 에이스를 부수고 싶어했으니 어릴 때부터 리시브 연습은 질리지도 않고 했지. 매일 집 앞 공터에 켄마랑 셋이서."
"헐 켄마 선배도요? 완전 의왼데요. 켄마 선배가 자발적으로 같이 연습했다는게요!"
"켄마는 하다가 끝날 기미가 안 보이면 먼저 도망가긴 했어. 어차피 쿠로가 매일 불러내니까 다음날도 하게 될 테고."
"쿠로오 너 새삼 진짜 집요한 놈이다. 그 켄마를 이때까지 배구를 하게 만들고. 그러고 보니까 '네코마의 뇌'도 '승리의 여신'도 전부 쿠로오 때문에 배구하게 된 거네. 징한 놈......"
"그래서 쟤가 미들 블로커 하고 사는 거지. 찐득찐득 하니까."
"니케 리드 블로킹이라고 해줄래?"
리드 블로킹은 세터가 어디로 공격을 올리는지 보고 난 후에 블로킹을 뛰는 방법이다. 정신 없는 랠리 중에 자기도 모르게 느낌대로 뛰지 않도록 많은 연습이 필요하지만 뛰어난 리드 블로킹은 결코 미끼나 세터의 농간에 속지 않아 마지막에 웃는 끈기의 블로킹이라고 불린다. '끈적끈적' 리드 블로킹을 구사하는 쿠로오의 모습은 과연 본인답다는 생각이 든다.
"너넨 진짜 너네한테 어울리는 포지션들 잘 찾아갔다... 쿠로오만 그런게 아니라 켄마나 니케도."
"야쿠도 잘 어울려. 포스가 '에이스' 같다는 느낌이잖아. '수비의 네코마'에서 리베로를 하는 건데 에이스나 다를 거 없지. 야쿠 국대 되고 올림픽 나가서 유명인 돼도 우리 모른 척 하기 없기다."
"그 말을 너가 하니까 뭔가 어디선가 인지 부조화가......"
이 합숙 후에는 춘계 전국 대회 도쿄 예선이 곧이다. 그리고 3학년은 춘계 전국을 끝으로 은퇴. 시간은 늘 많은 듯 충분하지 않다는 말에 동의한다. 이 팀으로 더 멀리까지 가고 싶다는 생각은 혼자서만 하는 생각은 아닐 것이다. 너와 만나서 다행이다. 너희와 만나서 다행이다. 네코마에 와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과거로 가도 같은 선택을 할 거라고. 다시 그 순간이 와도 또 한번 배구를 할 것이고 켄마와 쿠로오가 부르는 공터로 나갈 거라고. 미래를 알더라도 생의 여러 갈림길에서 선택을 바꾸지 않을 거라 확신한다. 마지막으로 향하는 3학년들의 여름이 끝나간다.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을 우리의 마지막 페이지를 쓴다. 춘계 전국으로 향하는 네코마 전원의 같은 마음이다.
"잘한다, 잘한다, 네코마! 가라, 가라, 네코마!"
"럭키, 럭키 노헤비! 럭키, 럭키 노헤비!"
도쿄는 학교가 많아 먼저 지구 예선을 하며 네 학교로 좁히고 그 네 학교로 대표 결정전을 해서 두 팀이 전국으로 간다. 이번 춘계 대회는 개최지가 도쿄이기 때문에 개최지 대표까지 포함해 전국으로 가는 티켓은 총 세 장. '도쿄에서 3위 안에 든다.' 전통 강호교들이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네코마는 지구 예선을 통과하고 마지막으로 도쿄 네 곳의 학교끼리 하는 대표 결정전에 오게 됐다. 켄마는 대진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코트 밖에서 네코마를 쭉 지켜본 입장으로 알 수 있다. 만약 네코마가 언젠가 한번 전국에 간다면 이번이 그 때라고. 직접 본 그동안의 네코마 고교 남자 배구부 모습 통틀어 지금이 최고로 완성도가 높다는 게 느껴진다. 대표 결정전에 온 학교 어느 하나도 만만한 곳은 없지만... 5대 에이스가 있는 후쿠로다니, 우승 후보 이타치야마, 네코마만큼이나 끈질긴 노헤비. 이번 대표 결정전에 온 나머지 세 학교들이다. 직전의 경기에서 후쿠로다니에게 패했기 때문에 이제 전국으로 가는 티켓은 노헤비 고교와 다투는 이 한 장, 딱 하나가 남았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건 이쪽도, 노헤비도 마찬가지. 안 그래도 네코마만큼이나 끈질긴 플레이 스타일의 노헤비가 다소 비열한 짓까지 포함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을 죄어 온다.
콰아앙!
후반으로 접어든 1세트 경기, 상대가 필사적으로 연결한 공을 다이렉트로 내리꽂는 네코마 최장신 하이바의 공격이 온 코트를 울리는 엄청난 소리를 냈다. 역시 경험이 부족해도 키가 크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위협적인 재능이다. 야쿠가 펜스 밖으로까지 점프해 연결한 공이 빛을 발했다. 뛰어난 리베로이기도 하지만 야쿠는 네코마 수비의 사령탑이다. 야쿠가 있어서 네코마는... 야쿠?
야쿠가 뛰어든 펜스 쪽에서 절뚝거리며 걸어 오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구급 상자를 집어들고 뛰어갔다. 펜스로 뛰어들었을 때 착지하며 관객 누군가의 발을 밟고 다리를 다친 것 같았다. 혼자서 걷지도 못하면서 야쿠는 괜찮다고 버텼다. 움직일 수 있다며, 자긴 점프를 안 하니까 괜찮다고. 딱 봐도 참고 뛸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나오이 코치님이 그런 야쿠를 부축하며 억지 부리지 말라고 코트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 어깨 양쪽을 코치와 1학년 후보 부원에게 부축받으며 코트를 나가던 야쿠가 쿠로오를 보더니 속상함에 울상이 된 표정으로 외쳤다. 미안하다고.
"야쿠에게는 늘 신세만 졌으니까, 가끔은 벤치에서 네코마의 승리를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태연한 표정으로 능청을 떠는 쿠로오의 말에 이어 3학년 부주장 카이가 야쿠에게 안심하라며 거들었다.
"걱정하지마. 전국대회에 갈 때까지 조금 쉬는 거야."
알고 있다. '수비의 네코마'에서 수비의 코어인 야쿠가 빠지는 순간 경기는 차원이 다르게 어려워진다는 것을. 야쿠가 나가자마자 일제히 표정이 굳는 쿠로오와 카이도, 코트 위와 코트 밖의 네코마 전원, 야쿠 본인도 알고 있다.
"나, 부딪치고 까지는 건 일상이지만, 그런 것 빼고는 지난 1년 동안 다친 적도 병에 걸린 적도 없어."
야쿠가 거의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이기며 말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이야...!"
단 한 장 남은 전국행 티켓. 에이스의 중도 이탈. 이 대회를 끝으로 3학년은 은퇴. 싫을 만큼 잘 아는 낯익은 기분이다. 어쩐지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오히려 그래서일까, 머리가 맑은 것 같다.
"우리를 보고 고양이라 하잖아 다들. 고양이가 맹수나 맹금류는 아니지만 난 그 별명 정말 좋아."
펜스 뒤편에서 야쿠에게 응급처치를 하며 말했다.
"네코마의 안정적인 수비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만 사실 네코마가 정말 강한 이유는 전국 몇 대 에이스니 하는 게 없는 덕에 팀으로 강한 우리는 어느 한 명이 빠졌다는 이유로 무너지지 않아서, 언제나 크고 작은 파도에 일일이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야쿠, 고양이의 생명은 아홉 개라는 말 알아? 위험한 일이 닥쳐도 거짓말처럼 살아있는 고양이의 생명력을 두고 그런 말이 생겼대."
젖은 스포츠 타올에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던 야쿠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래서 난 '고양이'라는 별명이 좋아. 걱정 마.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전체'로 강한 거니까, 한 명 코트 밖으로 나온 위기 정도에 무력하게 무너지지 않아."
마음이 차분하다. 스스로가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정말로 괜찮아졌구나 하고. 학기 초, 묻어둔 감정이 다시금 실감날 것이 무서워 쿠로오에게 답을 해주지 못했던 그 날이 생각났다.
"...니케, 너 예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정말 티비로 보던 거랑 이미지가 다르네."
"그 말 어째 자주 듣는 것 같네. 생각보다 더 수수하지?"
그제서야 야쿠가 살짝 웃었다. 확실히 그렇다면서.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 소리가 나고 야쿠를 부축해 함께 코트로 돌아갔다. 쿠로오, 카이, 야쿠. 함께 네코마에 왔던 넷이서 껴안자 눈물이 났다. 야쿠는 꾹꾹 눌러둔 감정이 북받치는지 차례로 동료들을 안고 후배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으면서도 연신 펑펑 눈물을 쏟았다.
'미안해, 나 때문에, 다 왔는데, 나 때문에, 너희들까지, 미안해, 미안해......'
마침내, 염원해온 전국으로. 모두와 함께 간다. 지나간 그 언젠가를 가슴에 묻고서.
공기가 차츰 차가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춘계' 전국인데 왜 1월에 하는 거예요? 원래 3월이었는데 3학년들도 참가할 수 있게 몇 년 전에 1월로 바꿨대. 단체 돕바가 든 박스의 포장을 뜯으며 하이바의 물음에 답했다. 겨울용으로 맞춘 네코마 배구부의 백색 돕바가 꽤 괜찮았다. 춘계 전국 때도 이걸 입고 가게 될 것이다. 고생했다, 문 닫는다, 등의 외침을 끝으로 오늘 자 훈련을 평소보다 이르게 마친 네코마 배구부는 함께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오늘은 1월 1일이라 오전 훈련으로 끝이었다. 전국 대회 전에 마지막으로 잘 쉬고 컨디션을 올려두라는 쿠로오의 당부가 이어진다. 머리 나쁜 티 내면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하루쯤 쉬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사실 본인도 말은 그렇게 해도 매일 숨이 벅찰 정도로 쉬지 않고 달려오다가 갑자기 오늘은 쉬는 날이라며 휴식이 주어졌다고 해서 가만히 있기는 쉽지 않다.
파아앙,
공이 느린 소리를 내며 천천히 떠올랐다.
"니케."
"응?"
"중학교 때 싱가포르 가면서,"
"응."
"무슨 생각했어?"
한 마디씩 번갈아 주고받으며 스파이크-리시브를 하는데 랠리가 길어지는데도 쿠로오의 리시브는 쭉 안정적이다. 역시 잘하네. 방금은 세게 쳤는데.
"아무래도 그거려나. 비행기 타는 거. 한 번도 안 타봤으니까, 완전 기대했지."
"어이쿠 감상이 카라스노 같네~ 도쿄 와서 철탑 볼 때마다 스카이트리냐던."
"쿠로, 긴장 돼?"
파아앙, 공이 또 천천히, 높게 떠올랐다.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1월 5일부터 진행되는 춘계 전국대회가 나흘 앞이다. 중학교 2학년 유스 올림픽 대표로 싱가포르로 갈 때 무슨 기분이었는지 묻는 이유 정도야 말 안해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비행기까지 타고 가서 하는 큰 무대니까 긴장을 안 하지야 않았었지만... 난 주전이 아니었다보니 내가 코트에 나갈 기회가 오기도 전에 져서 일정 끝나면 어떡하지 하는 그런 게 더 걱정이었던 거 같아. 나갈 기회 한번 오기만 하면 아주 아무도 날 못 잊게 자다가도 생각날 임팩트를 남겨주겠다는 뭐 그런 결심을 했었던가... 설마하니 일정 내내 내가 나가게 될 거라곤 비행기 타러 갈 땐 생각도 못 했지. 솔직히 선수단의 비주전 막내로 따라가면서 긴장보다는 비행기 타서 먹을 기내식 생각을 더 한 건 그럴 만 하지 않냐."
"...너 이거 어디 인터뷰에서 말 한 적 없지? 대문짝만하게 충격, 속보 이런 말 달고 논란 기사 올라오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네."
"쿠로오 테츠로 씨만 아는 거니까 그 사람만 비밀로 해 주면 기사는 안 뜰 걸~"
새해라 오전 훈련 끝나고는 쿠로오, 야쿠와 셋이서 도쿄 아사쿠사의 센소지에 다녀왔다. 근처 신사로 가자는 쿠로오에게 클수록 영험한 법이라며 야쿠가 정한 곳이다. 쿠로오는 켄마가 먼 데는 피곤하다고 안 따라온다며 항의했으나 어차피 켄마는 가봤자 전국대회가 최대한 덜 뛰고 끝나게 해달라는 소원이나 빌 테니 우리끼리 갔다오자고 이렇게 야쿠랑 센소지에 오게 된 것이다. 센소지에서 신년 소원을 빌고 나오면서 풀빵을 샀다.
"니케 무슨 소원 빌었어? 네코마 전국 우승?"
쿠로오가 손에 든 종이 봉투에서 풀빵을 하나 입에 넣으며 물었다.
"그건 너네가 알아서 할 테니 난 끝까지 다치지 않고 하다 오면 좋겠다 빌었어. 소박하냐?"
"아니, 그거면 충분하지."
야쿠가 풀빵을 우물거리며 듣다가 쾌활하게 답했다.
"야쿠는?"
"야쿠 그런 소원 빌었을 것 같다. 3학년들 졸업하고 떠난 후에도 1학년 초짜 애송이들이 제발 멍청한 짓 하지 말고 삽질 안 하게 해주세요, 같은."
"큭... 예리하네... 그래도 일부러 센소지까지 왔으니까 좋게 좋게 원대하게 빌었어. 앞으로의 네코마도 잘 부탁한다고."
"와아... 나 야쿠가 우리 엄마였음 좋겠어..."
"정작 그 1학년 당사자들한텐 호랑이 야쿠 선배님이지만 말이지~"
시비인 듯 아닌 듯 히죽거리는 쿠로오에게 야쿠도 물었다.
"쿠로오 넌 무슨 소원 빌었는데? 네코마 전국 우승?"
"아니, 그 정도로는 시시해서 딴 거 빌었어. 1년에 한 번 뿐인 신년 소원이니까 이럴 땐 욕심 부려야 돼."
"주장이 우승보다 욕심나는 게 있다니 불량하네~ 이건 내가 평생 모른 척 해줄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쿠로오가 어떤 걸 바랐는지는 알 것 같았다.
"뭐야, 춘계 전국 나흘 남겨두고 결국 아무도 전국 우승 같은 걸 안 빌었단 말이야?"
기가 막히다는 듯 말하는 쿠로오에게 그건 다른 애들이 많이 빌었을 테니까 이미 그 소원은 충분히 여러 개 접수되었을 거라 했다. 아까 시미즈랑 문자했는데 카라스노 3학년들도 같이 신사 갔다 왔대. 오 역시 걔네도? 응, 곧 보겠네, 걔네 쪽도 전국 우승 같은 거 잔뜩 빌었을 테니 밀리면 안 된다? 까마귀보단 고양이가 영험하니까 걱정 붙들어 매십쇼, 네코마 승리의 여신님, 하고 뻔뻔한 미소를 띠고 능청을 떠는 것이 웃겼다.
그렇게 신년 맞이 참배를 다녀오고는 켄마가 집에 애플파이 오븐에 넣고 굽기만 하면 끝나니까 그거 먹게 오라 했기에 기다리는 동안 쿠로오와 공터에서 잠깐 배구공을 만지던 참이었다. 계속 말을 주고 받으면서도 안정적인 쿠로오의 리시브가 쿠로오란 사람의 애정의 형태를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주 어린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학창시절이 거의 끝나가는 오늘,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한결같은 애정과 노력이 천천히, 그리고 깨끗하게 떠오르는 공에 담겨 있었다. 진심으로,
"긴장할 필요 없을 것 같네."
"그럼 애플파이 먹으러 들어갈까. 1월이라 까딱 방심하면 감기 걸려."
센소지에서 조그만 오마모리를 사왔다. 켄마를 닮은 삼색 고양이 장식이 달린. 아무리 그래도 춘계 전국을 나흘 남겨두고 네코마의 '뇌'가 신년 소원조차 빌지 않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쿠로오가 제안한 것이었다. 켄마 우리가 뭐 사왔는지 봐라, 파이 먹기 전에 먼저 여기다 신년 소원 빌어줘. 뭐냐며 귀찮아하면서도 이렇게 켄마까지 소원을 빌었다. 켄마 진짜 최대한 덜 뛰고 끝나게 해달라고 빈 건 아니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쿠로... 파이 먹어.
생애 첫 전국까지 앞으로 나흘,
사흘,
이틀,
하루―
도쿄 체육관 메인 아레나의 오렌지 빛 조명을 가득 받으며 공이 천장을 향해 떠올랐다.
어느 하나 대단한 놈이 없는 팀은 없다. 전국 대회에 온 이상 다들 저마다 여기까지 올라온 저력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나이스 리시브!!"
스파이크를 때리는 족족 리시브가 올라오자 상대 팀 에이스의 얼굴이 피로로 엉망이 되어가는 것이 코트 밖에서까지 보였다. 도저히 뚫리지 않는 네코마 수비 그물에 동분서주하다가 체력이 바닥난 것이다.
"원터치!!"
"후쿠나가!"
삑, 삐이익―...
그렇다고 지상의 리시브를 지나치게 의식하게 되면 '벽'에 걸린다. 켄마는 쿠로오의 블로킹을 맞고 찬스볼이 된 공을 2학년 윙 스파이커인 후쿠나가에게 연결해 날카로운 코스의 스파이크로 득점해냈다. 경기 종료. 세트스코어 2:0으로 고치 현의 키요카와 고교를 꺾고 전국대회 첫날, 1회전에서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전국 무대에 '안정된 승리' 따위는 없지만, 솜씨 좋은 에이스가 있다는 이유로는 네코마를 부술 수 없다.
춘계 전국이 시작됐다. 네코마는 도쿄 체육관 인근의 숙소에서 머무르면서 경기를 치른다. 토너먼트란게 늘 그렇지만 전국 어디에서 온 강호교이건, 시드교이건 뭐건 한 번이라도 지면 바로 탈락이다. 그 살벌한 시스템 안에서 눈 앞의 승부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보통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회 시작 하루 전에 미리 숙소에 도착해 최대한 긴장을 풀면서 평소의 컨디션을 끌어올리는 것도 그런 이유다. 저녁 시간 후 3학년들끼리 로비의 쇼파에 앉아서 앞으로 춘계 전국 나흘 동안 자기가 제일 눈에 띄겠다느니, 자긴 여자 아나운서랑 인터뷰할 준비도 다 되었다느니 하는 소리를 하며 설렘과 긴장이 섞인 말들을 떠들었다.
첫날 경기에서 살아남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에 숙소로 돌아가 내일 있을 이틀째의 경기를 준비한다. 짐을 챙겨 도쿄 체육관을 나서는데 카라스노 배구부와 마주쳤다.
"아이고~ 시골 촌뜨기 까마귀 님 아니신가. 잘 됐네, 잘 됐어. 먼 길 왔는데 곧장 돌아가지 않아도 돼서 말이야."
쿠로오가 시비... 아니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카라스노도 첫날 경기에서 살아남았다. 때문에 어제 묵었던 숙소로 돌아가 내일 싸울 상대에 대한 작전을 세우는 등 다음 날을 준비하게 된다. 네코마는 사루카와 공업고교, 카라스노는 이나리자키 고교와 싸워 '이틀째'를 살아남으면 사흘째에 서로를 만나게 된다. 라이벌이자 동지, 혹독한 첫날의 일정 끝에 본 서로의 얼굴이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었다. 저마다 격려하며 인사를 나누다 팀을 이끌고 각자의 행선지를 향하는 두 주장들의 얼굴에 웃음기 대신 긴장감이 서려 있다는 건 '이틀째를 살아 남는다'는 것이 얼마나 만만치 않은 일인지 느끼게 한다.
사루카와 공업 고교는 과거 네코마타 감독님의 제자가 감독으로 있는 학교다. 네코마와 마찬가지로 징글징글한 수비력을 자랑하는 곳.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에도 켄마는 평소의 휴대폰 게임 대신 태블릿으로 경기 영상을 돌려 보고 있었다. 경기 영상을 보면서 집중하는 켄마의 모습은 어릴 때부터 수없이 봐왔지만 언제나 섬짓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주장과는 다른, 그래, 어릴 적의 쿠로오의 말을 빌리자면 '참모'. 네코마의 뇌, 승리를 지휘하는 참모, 네코마란 체스판을 움직이는 플레이어. 경기 전 항상 외치며 의지를 다지는, 켄마가 죽도록 부끄러워하는 네코마의 출진 구호 속 주인공도 바로 켄마다. '우리들은―,'
"우리들은 혈액이다. 막힘없이 흘러라. 산소를 공급해. '뇌'가 정상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
비장한 구호를 들으며 켄마가 늘 그랬듯 한숨을 쉬었다. 예전에는 하지 말라고 불평이라도 했었는데 이젠 체념한 것 같았다.
사루카와 고교는 정말 미리 들은대로 상당히 끈질겼다. 항상 네코마 입장에서 네코마 배구부로 살았으니 잘 몰랐는데 우리랑 경기하는 상대 팀이 네코마를 보면서 이런 느낌이었구나 싶었다. 이건 들어갔다, 싶은 공격도 받아올리는 모습이 감탄스러워 욕과 탄성이 섞인 감탄사를 뱉게 된다. 상대 쪽도 마찬가지로 그러고 있겠지. 그런데 가만 보니 그것만은 아닌 듯 했다.
"저쪽 팀, 우선 켄마를 뛰게 만들려는 느낌인가."
1세트 두 번째 타임아웃 때 쿠로오가 그 위화감을 지적했다. 공격을 한 번에 성공시키지 않으려는 느낌, 대신 네코마의 리듬을 무너뜨려 세터 정 위치로 날아오는 A패스의 비율을 떨어뜨리고 켄마의 체력을 깎아 부순다는 작전.
"그래, 과보호 좋지! 세터를 움직이게 하지 않는다, 그게 네코마의 실력이야."
우린 네코마이므로 그런 상대의 교묘한 압박도 적응해 보이겠다는 쿠로오의 말에 아쿠도 말을 더한다.
"하지만,"
팀원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평소보다 한층 성격 보이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켄마가 입을 열었다.
"단순한 인내력 대결은 재미 없는데."
작전을 지시하는 켄마를 보다가 생각했다. 배구를 하는 건 물론 즐거웠지만 배구라는 스포츠 자체가 재밌어진 계기가 이거였다고. 초등학교 시절의 어릴 적 어느 경기엔가, 늘 나오던 우리 학교 쪽 세터가 갑작스레 오지 못해 켄마가 코트에 서게 됐는데 평소와 같은 선수들, 평소와 같은 상대였는데 완전히 다른 팀이 됐던 일. 곧이어 타임아웃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사루공업은 체력이 약한 이쪽 세터를 부수기 위한 작전을 가속했다. 보기 드문 장면들이다.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켄마의 모습은. 평소에 그다지 표정이 없는 켄마가 지칠수록 갖가지 짜증난 표정들을 다채롭게 보여줬다.
"마이 볼!"
야쿠의 리시브가 네트 앞 쪽으로 조금 흔들렸다. '네코마' 하면 보통 끈질긴 수비력을 자랑하는 학교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실상 네코마의 안정적인 리시브는 그저 원활한 플레이를 위한 '조건'일 뿐. 그게 다라고 느꼈다면 이미 덫에 걸린 것이다. 환혹의 세터가 놓은 덫에. 알고 있을까, 지금 눈앞의 이 경기가 게임 화면이었다면 화면 상단에 위험을 경고하는 상태 메세지가 긴급하게 깜빡거리고 있을 거란 것을.
'코즈메 켄마가 함정을 발동합니다.'
진풍경이다. 리시브가 흔들린 공의 궤도를 따라 라이트로 걸어가는 켄마를 마치 상태 이상에 걸린 게임 속 몹처럼 본인들도 모르게 따라가고 있는 상대 팀 블로커들의 광경이. 레프트 끝 후쿠나가의 앞이 블로커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열렸다. 네코마는 노블로킹으로 스파이크를 때릴 기회. 그래도 상대가 완전히 멍청이는 아닌가 보다.
"스테이!"
이상함을 감지한 저쪽 주장이 움직이지 말고 블로커 정 위치에서 대기하라고 신호했다.
상대가 위험함을 눈치채자 켄마는 보란 듯이 반대 쪽으로 토스를 보내 좁은 블로킹 사이로 카이의 스파이크를 성공시켰다. 국제 대회도 나가며 평생 배구를 했었지만 정말 흉내도 못 낼 솜씨란 생각을 한다. 저렇게 영 점 몇 초 안에 몇 수나 머리를 굴리며 체스판을 움직이는 켄마를 보면. 중계석에서도 저 기막힌 머리싸움이 생생하게 전해진 듯 했다. 네코마의 세터가 보통 배짱이 아니라는 중계가 들려온다.
저쪽 선수들이 방금의 플레이로 동요하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조종하려 했는데 조종당하고 있었다니, 의심이 의심을 낳고 플레이엔 확신이 떨어지고 실수가 이어진다. 머리 싸움에서 밀리면 그렇게 자멸한다. 역시 상대가 타임아웃을 불렀다.
그래도 켄마가 체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고 확실히 체력이 깎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터의 체력을 깎는다'는 상대의 작전에 의도적으로 흔들린 리시브를 섞는 등 오히려 더 부하를 걸어서 대응한다는 자신의 작전에 켄마가 평소보다 몇 배로 힘들어했다.
타임아웃 이후 동점으로부터 이어진 길고 긴 듀스, 비슷하게 수비가 탄탄한 두 팀 모두 한 치의 양보 없는 랠리로 전원이 한계 이상으로 지쳐갔다. 켄마가 저 정도로 무리하는 건 거의 처음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한 그 순간, 다소 짧게 날아온 패스에 켄마가 공 아래로 움직여 셋업을 올렸다. 세터 머리 위 정 위치로 날아오는 A패스 때만 보여줬던, 어디로 셋업을 올릴지 절대 예측이 안 되는 켄마 전매특허의 극 최소 모션 셋업.
셋업이 후쿠나가에게 날아갔다고 알아챈 순간은 이미 막기엔 늦은 거다. 그 소리조차 간절했던 경기 종료 휘슬 소리가 울린다. 24:24 부터 이어진 듀스가 30:32가 되어서야 겨우 네코마의 승리로 막이 내렸다.
휘슬 소리와 동시에 완전히 녹초가 된 켄마가 코트 위에 엎어지자 후쿠나가가 켄마를 붙잡아 끌어올렸다. 나이스 셋팅이었다며. 어째 쿠로오의 얼굴이 빙글빙글 웃고 있는 것이 안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쿠로오는 세상에 귀찮고 하기 싫은 것이 더 많은 켄마가 배구를 하도록 끌어들인 장본인이라 초,중학교 때 가끔 무리하게 훈련을 했던 날이나 시합이 있었던 날이면 열이 나서 앓는 켄마에게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고, 아주 좋아하지는 않지만 딱히 그만둘 이유는 없어서 배구를 계속한다는 켄마가 조금은 더 재미를 느끼고 적극적으로 했으면 바라는 걸 네코마 배구부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삑!
와아아아아!
짐을 챙겨 퇴장하는데 옆 코트의 함성이 엄청났다. 취주악부를 대동한 이나리자키의 응원단이 카라스노에게 점수를 빼앗아 올 때마다 거의 경기장을 집어삼킬 정도로 무시무시한 응원을 보내왔다. 우리 경기가 끝나고 펜스 뒤편, 한 발 떨어진 이곳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할 것 같았다. 카라스노가 이번 대회 시드 배정 고교 중 하나인 저 이나리자키를 꺾어야만 3회전, 즉 내일의 경기에서 네코마와 만나 '쓰레기장의 결전'이 성사될 수 있다. 펜스 너머로 카라스노의 경기를 보는데 켄마가 다가와 섰다. 딱 한 명 있지. 켄마가 적극적으로 변하는 상대가. 카라스노의 10번, 히나타를 응시하는 켄마의 날카로운 동공이 선뜩하게 반짝인다.
"카라스노의 상대는 '미야 트윈즈'인가."
"오오?! 그래도 한 세트 먼저 선취했잖아?"
카이와 야쿠도 옆으로 와서 서며 우리의 라이벌이 강호 이나리자키에 대항하여 어떻게 싸우고 있나 구경했다. 이나리자키는 효고 현 대표로, 그 학교의 미야 쌍둥이는 미디어에도 이미 여러 번 소개되었을 만큼 유명한 팀이다. 카라스노의 세터 카게야마와 마찬가지로 저쪽도 세터 미야 아츠무가 유스 국대, 에이스는 올해 전국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 에이스. 한마디로 누구나 인정하는 이번 대회 유력 우승 후보 중 하나란 뜻이다.
네코마는 전원 짐을 챙겨서 관중석으로 이동했다. 어느 쪽이 이기든 저기서 올라오는 팀과 내일 붙게 된다. 당연히 우리야 카라스노가 올라와서 인연의 라이벌과 '쓰레기장의 결전'을 전국 무대에서 하고 싶다는 마음이지만 이나리자키가 올라오면 그건 그거대로 보통 일이 아니다. 1세트는 비등한 가운데 카라스노가 따갔지만 2세트는 확실히 이나리자키가 우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기 하는 거보다 보는 게 더 떨린다."
"나 너 올림픽에서 코트로 처음 나올 때 너무 떨려서 심장 뱉을 뻔 했어."
옆에서 듣던 야쿠가 순간 입에 머금은 물을 뿜으려다가 간신히 삼키고 말했다.
"푸하하학, 코즈메 저거 진짜야? 쿠로오가 그랬어?"
"그때 쿠로 거의 공포 영화 볼 때보다 더 떨었어요. 니케가 리시브 받을 때마다 공이 무슨 자기 얼굴로 날아오는 것도 아니고 계속 비명 지르면서... 시끄러워서 집으로 보내려다 말았었어요."
"...야쿠 너 너무 웃는다... 먹는 거 안 얹히냐?"
"아~ 진짜 부럽다. 너무 재밌었겠다, 소꿉친구가 중학교 가더니 올림픽 나가서 티비로 나오고... 나중에 우리도 누구 올림픽 안 나가나. 우리 애들 다 불러서 같이 중계 보자."
객석에서 같이 도시락을 먹으며 경기를 보는 재미가 제법 괜찮았다. 2세트를 계속 큰 점수차로 끌려가고 있는 카라스노가 상당히 걱정스럽긴 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부분이겠지만 확실히 경기는 직접 할 때보다 이렇게 객석에서 보는 쪽이 몇 배로 긴장된다. 잘 해내리라 믿는 것, 잘 한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우리와도 무관한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카라스노에게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는 시시각각 손에 땀이 났다. 25:16, 큰 점수차로 2세트를 내주고 3세트가 시작되었다. 카라스노도 초 공격형의 팀이지만 이나리자키도 그에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화려하고 관중을 경악케 하는 플레이를 보여줬다. 우승 후보도 우승 후보지만 '최강의 도전자'란 별명이 왜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카라스노가 가만히 당할 팀은 당연히 아니다. 스타팅 로테이션을 약간 돌려 이나리자키와의 마지막 세트에 나섰다. 저쪽 위협적인 공격수들에 카라스노 장신의 선수들이 좀 더 자주 매치되도록. 양 팀 모두 화려하고 다채로운 공격을 보여주며 엎치락뒤치락 했지만 먼저 매치포인트에 도달한 건 이나리자키였다. 24:22, 카라스노가 24점까지 따라붙어 듀스를 만들지 않는 이상 이나리자키에게 한 번이라도 득점을 허용하면 그대로 경기 종료, 세트 스코어 2:1로 카라스노는 패배하여 사흘째 경기를 오지 못한다. 실수해도, 어설프게 공격해도 패배만이 기다릴 뿐이다. 벼랑 끝의 카라스노가 한 데 모여 둥글게 어깨동무를 하면서 침착하게 가자며 마음을 다잡는다. 한 걸음 뒤가 천 길 낭떠러지일지라도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릴 때까지 승패는 모른다. 알고 있지만, 꺾이지 않고 위를 본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정신력으로 온몸을 짓눌러오는 중압감의 무게를 이겨 내는 일이다. 중력에 반하여 한 걸음 더 앞으로, 1초 더 빠르게 위로 뛰는 것만큼의 무게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카라스노의 저 어깨동무를 네코마 전원 누구 하나 어떤 말도 않고 그저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부디 그 중압감에 지지 말기를 같은 마음으로 응원하며.
지지 마라, 꺾이지 마라,
'날아라.' 카라스노의 새카만 현수막을 바라보던 어느새 양손이 모아져 있었다.
...삑,
삐이익―...
'30:32'
그리고 숨을 죄는 듀스로부터 마침내 점수판에 찍힌 2점차. 종료 휘슬이 도쿄 체육관에 울렸다. 함성으로 체육관이 들썩이는 가운데 쿠로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철수한다. 가자."
염원의 전국대회, 인연의 대결. 춘계 전국 3일차인 내일은 네코마타 감독과 우카이 감독이 네코마타 선수, 우카이 선수라고 불리던 시절부터 수십 년을 기다려온 네코마vs카라스노, 쓰레기장의 결전이다.
"네코마고는 '견실함'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팀이었지만, 공격력이 뛰어난 미들 블로커가 들어오며 공수 모두 수준이 한 단계 높아졌습니다."
"기세가 한껏 오른 카라스노고에 네코마고가 어떻게든 잘 맞서기를 바랍니다."
"이 자식! 우리가 아래인 것처럼 말하지 마!"
숙소의 TV로 춘계 전국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야마모토가 말했다.
"하마평은 당연히 카라스노가 유리하겠지. 강한 팀을 잔뜩 꺾었으니까."
TV 앞이 아니라 저쪽 한 켠에 벌써 이불을 깔고 게임기를 붙잡고 있던 켄마가 야마모토에게 딴지를 걸었다.
"멍청아, 우리도 강팀을 꺾었으니까 여기에 있는 거잖아!"
"자기 이불만 깔면 다야?!"
"뭐―? 하지만 우리가 우시와카나 미야 트윈즈를 꺾을 수 있을까?"
"......"
"왜 둘 다 말이 없어!"
예리하게 사실만 골라 집는 켄마의 말에 야마모토와 쿠로오가 바로 입을 다물자 그 모습들이 재미나는지 야쿠가 신나게 웃었다.
"해 보기 전에는 모르죠. 게다가 주먹은 가위를 이기지만 보자기는 못 이기니까요―!"
"후후,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쿠로오는 얄밉도록 얼굴을 늘어뜨리며 이죽이는데 켄마는 가볍게 웃으며 받아쳤다.
"우열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러 시합을 하러 온 거니까."
이거다... 이거지 하는 한 줄 정리였다, 켄마의 그 말은. 다들 같은 생각을 하는지 얼굴빛이 설렘으로 물들었다.
카라스노의 10번, 조그만 1학년인 통칭 '꼬맹이' 히나타 쇼요는 켄마를 좋아한다. 시합을 이긴다는 것을 포함하여 '켄마를' 이기고 싶어 한다. 카라스노는 5월 골든 위크 연습 시합, 여름 합숙 수십 번의 경기를 통틀어 한 번도 네코마를 이긴 적이 없다. 카라스노가 '새끼 까마귀'이던 5월, 서로를 처음 만나 시합을 하고 돌아가는 켄마에게 히나타가 그렇게 물었다고 했다. 전에 먼저 길에서 마주쳤을 때 딱히 배구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했잖아. 오늘은, 오늘 이기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어? 라며. '그냥, 보통 정도.' 켄마가 뭐라고 답했는지 히나타가 했다는 그 질문을 들을 때부터 예상이 갔다. 그런데 켄마의 그 맥 없는 답을 들은 히나타가 했더란 말이 굉장했다.
'다음 번에는 꼭 필사적으로 뛰게 만들어서 우리가 이길 거야. 그래서, '별로'가 아니라 '분하다'거나 '즐거웠다'는 말을 하게 해줄 거야!'
와, 그거 나도 진짜 기대되네. 쿠로오에게 미야기로 합숙을 다녀온 후일담을 들으며 절로 감탄이 나왔던, 패기 넘치고 맹랑한 다짐이고 또한 선전포고였다. 그치? 빨리 카라스노가 더 잘하는 거 보고 싶더라니까. 누구보다도 오래 그걸 바라 온 쿠로오가 기대를 숨기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던 것도 기억난다.
"우리들은 혈액이다."
번쩍번쩍 반짝반짝하는 도쿄 체육관의 눈부신 조명 아래, 피처럼 붉은 유니폼을 입은 네코마 전원이 둥글게 모여 손을 모았다.
"막힘없이 흘러라."
아, 약동하는 심장 동맥의 박동으로나마 지금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산소를 공급해."
시간을 멈춰버릴 듯한 전율에는 공기마저 떨리는 것 같았다.
"'뇌'가 정상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마침내 '쓰레기장의 결전'이네요, 네코마타 선생님…!'
아까 경기장으로 막 들어왔을 때 나오이 코치님과 네코마타 감독님이 하던 대화를 떠올렸다.
'으~음. 하지만 카라스노와 싸우는 것을 목표로 여기에 온 건 아니야. 그저, 이 경기를 기대하는 인간이 조금 많을 뿐이지. 나를 포함해서 말이야. 이 녀석들은 옛날의 인연 따위 알 바도 아니겠지. 이 녀석들에게는 이 녀석들의 인연이 있는 거야.'
감독님은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우리도 카라스노도 이미 알고 있다. 이 순간도, 인연도 우리가 모르는 저 먼 과거에서부터 연결되어 비로소 존재하는 '현재'라는 것을. 배구에서 서브만을 제외하고 모든 플레이는 이어져 있기에 어떤 득점도 어떤 실점도 누구 한 명의 책임이란 것이 없듯이. 지금, 이 코트 위의 '현재'들이 서로를 똑똑히 마주보며 외쳤다.
"먹어치워 주마!"
춘계 전국 3회전 휘슬이 울렸다. 카라스노의 유스 국대인 1학년 세터, 카게야마의 점프 서브로 시작한 첫 번째 세트. 굉장히 강력한 서브를 넣는 선수로 상대 팀이 손 쓸 새도 없이 서브로만 몇 점이나 따가기로 유명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오늘도 처음부터 강한 서브를 날려오는데 대포알 같았던 공은 네코마 부주장 카이의 팔에 닿은 후 안정적이고 깔끔한 리시브가 되어 올라온다. 패스는 켄마를 거쳐 하이바로, 카라스노의 리베로에게서 카게야마의 토스로 이어져 카라스노의 2학년 공격수의 스파이크가 되었다. 스파이크는 네코마의 블로킹 밖 비워진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네코마 2학년 공격수 야마모토에게로, 하이바와 카라스노10번 히나타의 밀어넣기 대결에 이어 떨어지는 공에 반응한 카라스노 주장의 리시브, 그리고 다시 순식간에 카게야마의 토스와 공중에서 기다리고 있던 히나타의 벼락같은 마이너스 속공으로 돌변했다. 그 굉장한 속도 때문에 켄마의 팔을 맞은 공은 튕겨서 펜스 밖으로 날아갔다. 눈으로 따라가기도 어려운 속도의 첫 랠리는 카라스노의 득점.
"축제다!!!"
코트 건너편 벤치에서 카라스노 3학년 세터가 외치는 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축제.' 이것 이상으로 오늘 이 경기를 잘 설명할 단어도 없지. '요즘 그런 생각을 해, 히나타가 재미있으니까 너희와 연습이 아니라 진짜 시합을 해보고 싶다고, 말이야.' 여름 합숙을 하며 켄마가 히나타에게 한 말이다. '지면 그 즉시 게임 오버인 시합.'
"'한 번 더'가 없는 시합이야, 코즈메!!!"
히나타가 켄마에게 지난 1년의 시간이 담긴 가슴 벅찬 선전포고를 날렸다. 설렘과 기대로 무장한 용사와 마침내 마지막 스테이지에 온 용사를 맞이하는 마왕의 은은하면서도 즐거워보이는 미소가 네트를 사이에 두고 교차했다.
쿠로오가 불안정한 리시브를 그대로 밀어서 세터 카게야마에게 꽂아넣는다. 속공 등의 공격없이 공을 상대 코트로 그냥 넘겨야 하는 불안정한 상황이라 해도 이렇게 세터가 퍼스트 터치를 하도록 해서 다양한 공격을 막는 재치는 꽤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정신 없는 랠리 중에 이런 상황이 오면 그냥 넘기기만도 급급해지기 때문에 저런 재치 하나하나가 곧 노련함의 증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라스노의 리베로가 백 존에서 뛰어올라 토스. 프론트 존에서의 리베로 셋업은 반칙이라 백 존에서 옆으로 점프해 세터 대신 셋업하는 것이다. 저 리베로 얼마 전까지 백 존 셋업을 시도하다 공과 함께 착지했었는데 또 한 단계 위로 갔다. 당연하지만 더 이상 지난 5월의 팀 레벨 1짜리 '새끼 까마귀'는 없다.
"니시노야! 만날 때마다 실력이 느는 거 아냐?"
네코마의 리베로 야쿠가 하이바와 교대하여 코트로 들어오며 카라스노의 리베로에게 소리쳤다.
"고마워요, 야쿠 선수!"
완전 정반대 스타일인 네코마와 카라스노의 공통점이 있다면 두 팀 모두 리베로 선수가 전국급 천재란 것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1학년이 많아 리시브가 불안한 카라스노는 저 리베로 덕분에 그 무지막지한 공격도 퍼부을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듣기론 저 선수 별명이 '카라스노의 수호신'이라는데 누가 지었는진 몰라도 어릴 때 쿠로오가 지어줬던 승리의 무적 대포니, 관동 무법지대니 하는 것보다 네이밍 센스 하나는 기가 막히다 생각이 든다.
켄마의 시선 페인트에 이어진 레프트에서의 스파이크. 쿠로오 진짜 올라운더네. 미들 블로커란 포지션에 충실하게 블로킹은 당연하고 리시브, 서브, 스파이크 전부 뭐 하나 빠짐없이 잘한다. 그러나 잘한다는 사실을 크게 의식하지도, 또는 못한다는 일에 크게 좌절하지도 않는다. 쿠로오가 빈틈없이 잘하는 것은 천재라거나 탁월한 운동신경이 있다는 설명보단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들일 줄 아는 사람이 집요하게 노력을 쌓아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가 가장 정확하지 않을까 생각해. 그런 식으로 쌓인 노력은 무너지지 않는다. 쿠로오를 무서워하는 타학교 선수들이 느끼는 막연하고 본능적인 '싫다'의 출처가 아마 이거겠지. 쿠로오는 배구를 잘 해서, 또는 못하는 걸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한 게 아니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저 한결같이 해왔을 뿐. 잘하게 됐단 건 쿠로오가 쫓아간 목표가 아니라 시간의 축적에 따른 결과로써 존재한다. 그래서 쿠로오의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의식하지 못하게 먹먹해진다. 저 스파이크에, 저 블로킹에 집요한 애정의 시간들이 전부 겹쳐 보여서.
로테이션이 돌아 후위로 내려간 히나타의 서브 차례. 후쿠나가가 깔끔하게 올린다.
''수비의 네코마'라는 별명은 꽤 마음에 들어. 그래도 그건 소극적이란 의미잖아.'
쿠로오가 10월 도쿄 대표 결정전 후에 했던 말이다. 현재를 지켜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카라스노가 더 이상 새끼 까마귀가 아니듯 네코마도 예전과 똑같은 네코마가 아니다. 리베로를 제외한 코트의 공격수 전원이 빠르게 뛰어오른다. 네코마 버전 퍼스트 템포의 싱크로 공격, 그리고 코트 너머로 그 광경을 마주한 카라스노의 뜨악 하는 표정들에 즐거움이 고양된다. 잘 안다고 생각한 상대의 예상 못한 모습은 적도 아군도 경기의 텐션을 한 단계 위로 데려가 준다.
네코마의 스파이크를 블로킹하는 카라스노 미들 블로커, 최장신 1학년인 츠키시마의 원터치와 히나타의 커버 리시브에 이어지는 카라스노 버전 싱크로 공격. 순간 쿠로오의 눈빛이 번뜩이더니 카라스노 주장에게 이어진 셋업을 완전히 셧아웃해냈다. 수비이자 동시에 공격인 플레이는 블로킹이 유일하다. 셧아웃 슈퍼플레이가 터지자 경기장에 함성이 울렸다. 우연이긴 하다. 스파이크를 건드리는 '원터치'나, 리시버가 스파이크를 받아낼 수 있도록 코스를 좁히는 것이 블로킹의 기본적인 목적이니까. 그래도 세터를 제외한 공격수 다섯 전원이 뛰어오른 싱크로 공격의 스파이크를 이렇게 경기 초반부터 완전히 셧아웃시키다니, 기복이 잘 없는 쿠로오의 컨디션조차 인연의 대결이라는 오늘의 매치에 답하듯 120퍼센트를 발휘하는 것 같았다. 다들 그랬다. 우리 쪽 선수들도, 카라스노의 선수들도.
지난 여름 합숙 제3 체육관에 반쯤은 끌려와서 쿠로오랑 후쿠로다니 에이스 보쿠토와 함께 야간 자율 연습에 참여했던 카라스노의 1학년 츠키시마가 이번엔 카라스노 핀치 서버의 변칙적인 플로터 서브를 통해 좁혀진 네코마의 공격을 셧아웃시켰다. 우리의 전력을 다음 순간 전력으로 넘어오는 상대. 마치 축제처럼 고조된 분위기에서 전력을 넘는 전력을 끌어낸다. 24점 듀스로부터 이어진 26:25, 네코마의 매치 포인트. 카라스노 공격의지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전원 싱크로 공격이 집요하게 펼쳐지면 네코마는 그 전력에 회답하며 공격이란 공격을 전부 받아 올린다. 야마모토의 리시브, 이어서 쿠로오의 혼신을 다한 커버.
"라스트!"
셋업을 올리며 속공을 꽂을 수 있는 공이 아니다. 켄마가 공 아래로 뛰어들어 카라스노의 코트로 공을 넘기는데
타
앙
켄마가 넘겨 준 찬스볼에 한 번 더 싱크로 공격을 가하기 위해 카라스노 선수들이 도움닫기를 하려 뛰어오르려는 찰나 공이 주인없이 그대로 그 사이로 떨어지며 코트를 울리는 공포스러운 소리가 터졌다. 우리 편의 실점도 아닌데 등골을 타고 오싹함이 올라온다. 27:25, 1세트 종료.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카라스노, 여기서 누구도 예상 못한 마주보기! 파란에 이어지는 파란!"
"어제 우승후보 이나리자키를 꺾고 올라온 미지의 옛 강호 카라스노, 제1세트를 빼앗깁니다!!!"
받아내기 버거운 스파이크도 아니고 허를 찌르는 페인트도 아니다. 가벼운 오버 핸드로 그냥 넘겨준 공이 그대로 코트에 떨어진 거다. 오늘따라 더 무섭네, 켄마…. 방금 그건 그냥 단순 실수가 아니다. 켄마가 공을 넘긴 곳은 공격에 들어가려는 스파이커들의 사이, 세터 카게야마가 토스를 올리러 네트 앞으로 달려나가는 길이자 사람들이 교차하는 곳. 말 그대로 카라스노의 그 엄청난 공격 의식조차 켄마에게 이용당한 거다.
"후후. 카라스노 선수들, 모두 '히나타화' 됐네."
코트 체인지를 하는 중 켄마가 오랜만에 붙은 카라스노와의 시합 감상을 중얼거렸다. 어떤 플레이도 완벽한 공략법은 없다. '상대가 승리하는 흐름의 공격 패턴'으로부터 점수를 두어 점 빼앗아 온다는 것이 공략이 목표로 하는 지점이다.
"히나타는 말할 것도 없이 성가시지. 그 히나타의 공격에 필요한 게 뭘까?"
어제 밤 숙소에서의 미팅시간에 켄마가 질문을 던졌다.
"근성!"
"활력!"
"돌머리 2인조는 좀 더 생각한 뒤에 신호를 보내."
활기차서 좋은 네코마의 1학년 하이바와 이누오카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손을 번쩍 들어 외치는 당당한 답에 켄마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대꾸했다.
"도움닫기...?"
"그래. 도움닫기가 없으면 점프의 높이가 낮아지니까."
켄마 못지 않게 관찰력이 뛰어난 쿠로오가 정확히 지적해냈다.
"그러니까 플로터 서브 조는 서브로 최대한 히나타를 방해해주면 좋겠지만,"
켄마는 화이트보드에 그려진 상대 측 코트를 9등분하여 칸에 1부터 9까지의 숫자를 적어나갔다.
"가능하다면 내가 말한 곳을 노려줘."
'2.'
'3.'
네코마가 첫 세트를 따내고 이어서 시작된 2세트, 우리에게 서브가 돌아올 때마다 켄마는 들릴락 말락한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또는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서브를 넣을 곳의 숫자를 지시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어떤 공격이든 전부 봉쇄하는 건 불가능해. 카라스노의 '평소라면 분명 들어갔을 몇 개'를 깎아내면 돼. 그 작은 스트레스가 쌓여 하나의 실수로 이어질지도 몰라. 그게 두 개, 세 개가 되면 더 좋겠지.'
'점', '선' 만이 아니라 히나타의 '동선'을 끊는다.
'도움닫기는 히나타의 날개야.'
'작은 키라는 불리한 조건을 전부 메우고도 남는 히나타의 그 날개를 전부 잡아 뜯는다.' 이번 전국대회 카라스노에 대항하여 켄마가 세운 작전이었다. 히나타에게 직접 리시브를 받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스파이커로, 리베로로. 히나타가 뛰어오르는 길을 끊어 히나타와 관련된 점수를 줄인다.
"하지만 '지금 히나타에게 코밋'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죠? 코즈메 선배 무서워요."
하이바가 초능력이라도 본 것처럼 물었다. 마치 이번엔 히나타에게 공이 올 거라고 미리 예측이라도 한 것처럼 히나타에게 모조리 블로킹을 붙여 스파이크를 셧아웃해내자 카라스노가 타임아웃을 불렀다. 전위 셋 모두 히나타에게 코밋하라는 건 켄마가 이번 랠리를 시작하기 전에 지시했던 것이다. 히나타가 우리의 작전에 조바심을 내며 짜증이 나 있음은 힘이 들어가버린 아웃이나 기세 좋은 블로킹으로 터치넷 실수를 범한 것이 그 증거야, 때마침 타임아웃을 부른 카라스노 덕에 우리도 잠깐 숨을 돌리면서 켄마가 땀 범벅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그리고 세터라면 스파이커의 실수를 그대로 놔두고 싶어 하지 않아."
이어지는 켄마의 설명에 하이바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네코마의 뇌'를 바라봤다.
"그래서 타이밍이 오면, 히나타에게 올릴 거라고 생각했어."
켄마... 우리 편이어서 다행이다. 아니 이건 다른 경기에서도 항상 생각했던 거지만 오늘의 켄마는 거의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 그 이상으로 전부 쓰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까마귀의 날개를 꺾어버리기 위해.
"코즈메 선배 무서워요."
"무섭지."
"무서워."
"설명을 해줘도 왜 똑같아?"
우리 편이라 다행이지만 카라스노는 더 무섭겠지. 수십 번의 연습경기에서도 이 정도로 철저하고 잔인하게 굴지는 않았으니까. 켄마는 아마 카라스노전 게임을 '전력을 다해서 무찌를 강력한 보스'라고 생각하고 임하고 있겠지만 켄마는 보스에 도전하는 용사 쪽 보다는…….
"히나타는 분명 전부 열심히 할 거야. 리시브도 도움닫기의 확보도. 하지만 '열심히 한다고' 뭐든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스피드에서의 교란도 190cm의 블로킹과 싸울 수 있는 점프도, 한 걸음의 지체로 전부 늦어지고, 그 존재감은 희미해지고 말아. 99%라 해도 쓸모가 없어. 100%로 점프할 수 없는 히나타에게,"
줄곧 시선을 아래로 두며 설명을 잇던 켄마가 날카로운 동공을 위로 들어 네코마 전원을 쳐다봤다.
"카게야마는 흥미가 없겠지?"
"......"
카라스노보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우리가 더 무서울 수도 있겠다.
"'강력한 보스와 싸우고 싶다'고 용사와 같은 말을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네가 '마왕' 쪽이라고 생각해."
쿠로오가 약간 시선을 피하듯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히나타의 존재감이 희박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시합이란 게 화이트보드에 그린 것처럼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무서울 정도로 켄마의 의도대로 끌려갔다. 카라스노 힘들겠네. 네코마에게 1세트를 빼앗긴 건 타격이 크다.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수비를 단계적으로 정비하고 구멍을 하나씩 메워가면서 상대의 숨통을 끊는 네코마 플레이 특성 상 초반에는 리드를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카라스노가 현재 코트 위의 이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면 세트스코어 2:0 스트레이트로 끝날 확률이 높다.
"카라스노의 작은 포인트 게터, 이번에는 무득점인 채로 물러갑니다."
작은 요괴 까마귀가 켄마에게 날개를 다 잡아 뜯겨 득점을 전혀 내지 못한 채 후위로 로테이션이 내려갔다.
"지금 계획대로 잘 되고 있는데 표정이 왜 그래?"
쿠로오가 켄마를 보더니 의아해했다. 켄마 표정이 그랬다. 누구라도 흠칫해서 왜 그러냐고 물을 정도로, 꼭 오래 물을 주지 않아 시든 화분처럼 눈동자에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저 얼굴 본 적 있는데. 게임 할 때 기껏 힘내서 최종 스테이지를 클리어해버리고 짓던 그 슬픈 표정.
"재미있는 히나타가 끝나버리는 건 슬퍼."
히나타도 켄마의 저 표정을 봤던 걸까. 히나타는 네코마에게 여름 합숙에서 수십 연패를 당해 원통해하며 분할 때도 저런 얼굴은 아니었다. 마치 자신을 송두리째 부정당했다는, 아 그렇지, 이기고 지고 이상의 어떤 차원으로, 빛이 꺼진 켄마의 눈동자가 스스로에게 모욕적이라는 듯 입술을 강하게 짓이기고 굳어진 얼굴을 했다. 스포츠란 게 승패가 다라는 그 말에 십분 동의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선수들에게 승패 이상의 것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카라스노가 히나타에게 붙여주었단 별명이 '최강의 미끼'라고 들었다. 세상 아무도 존재감 하나 없는 사람을 미끼라고 부르지 않는다.
"켄마 지쳐보이네요."
오버 핸드(손을 머리 위로 올려서 하는 패스)로 넘겼어야 할 공을 겨우 언더로 넘기는 켄마를 보자 이쯤해서 체력의 한계가 왔구나 느껴졌다. 쉬지 않고 전략을 처리하며 팀을 지휘해야 하는 세터는 보기보다 훨씬 체력 소모가 심한 포지션이다.
"타마히코(1학년 세터)를 부를까요?"
"으음. 아직 좀 더 지켜보자. 사루카와전도 전부 다 뛰었으니까. 게다가,"
코치님의 말에 네코마타 감독님이 은은하게 웃었다. 마치...
"실망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구나, 코즈메."
마치 시합이 시작되며 양 팀이 코트에 나올 때 히나타가 네트 너머로 선전포고를 날리던 순간의 켄마가 짓던 것과 같은 얼굴로. 카라스노가 여길 돌파할 수 있을까. 여기서 네코마가 준비하지 못한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날개를 죄다 잡아 뜯긴 히나타가 켄마의 새장 속을 탈출할 힘을 갖고 있을까. 2세트 종반 22:21, 여기서 판을 뒤집을 수 있을 반격의 수가 있다면 그건...
" '오픈' !! "
리시버며 스파이커며 정신없이 뒤엉켜 숨 돌릴 틈조차 부족한 랠리 속에서 카라스노의 세터, 카게야마가 신호탄과도 같이 또렷하게 외쳤다.
센터 오픈...! 이제껏 작은 키와 약한 힘을 보완하기 위해 무조건 남들보다 빠르게, 빠른 도움닫기 빠른 스파이크로 승부를 해왔던 히나타에게 높게 올린 토스에 맞춰 여유를 갖고 도움닫기를 시작하는 3rd 템포의 공격을. 히나타 같은 선수가 아니라 주로 키와 파워를 갖춰 상대 팀 3인 블로킹에 정면으로 싸울 수 있는 선수가 하는 공격이다. 히나타가 전에 없이 눈을 반짝이더니 활주로를 달려 날아오른다.
콰앙,
온몸을 실어 바닥을 박차는 소리는 새장을 부수고 탈출하는 소리다. 새로움이란 촉매로 자극되어 타오르는 켄마의 눈동자에 파동이 인다. 오픈 공격이 무적은 아니지만 '길'을 만드는 한 가지의 선택지가 된다. 24:25 매치포인트, 빠르고 강한 네코마 싱크로 공격의 정면으로 정확히 들어와 리시브하는 건 다름 아닌 히나타. 히나타가 받을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한다는 걸 히나타도 카라스노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억지로 받게 하는 공이 있다고 해서 리시브와 공격 어느 하나를 버릴 수는 없다. 이 리시브는 비록 리시브로 압박해오더라도 어느 한 쪽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공은 그대로 네트를 넘어와 네코마 코트에 직접 떨어진다. 24:26, 누가 보면 경기를 이겼다고 착각할 만큼 카라스노가 벅찬 환호성을 질렀다. 지난 1년 동안 두 학교가 붙었던 수십 번의 경기에서 카라스노가 처음으로 따낸 한 세트였다. 비장의 필살기 같은 건 없었다. 히나타가 써낸 건 가장 당연하고 단순한 '정답'이었기에.
"아깝지. 이런 축제가 2세트만에 끝나면."
마지막 세트의 스테이지에 올라가기 전 마지막으로 전원이 모여 다시 한 번 손을 모았다.
"힘든 시간은 넘어 왔다."
쿠로오가 들뜬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이제 상을 받을 차례야."
"와아아아아!!"
일제히 뛰어오르며 수건이며 물통이며를 하늘 높이 던지면서 함성을 지르자 저쪽에서 카라스노도 뭔지는 몰라도 덩달아 뛰어오르며 함성을 질렀다. 이게 마지막이다.
'이번 세트에서 어느 한쪽은 탈락한다. 3학년은 은퇴. 그 녀석들은 끈질기니까 2세트가 끝나고 피로는 최고조. 피로 때문인지 부담감 때문인지, 당장이라도 무릎이 덜덜 떨릴 것 같다.'
자, 최고의 배구를 하자.
우리도 카라스노도, 매 순간 서로의 한계를 넘어 그 까마득한 저편에서 부딪친다. 서로가 적인 동시에 서로가 서로의 스승. 뒤쳐져 남겨지기엔 이 순간이 너무 아깝잖아. 높아져가는 집중력. 다음 한 점, 빼앗기면 안 되는 한 점. 두려움과 부담감이 몸을 짓눌러오는 순간일지라도 아쉬움은 단 한 줌도 남기고 가지 않겠다는 전력을 담은 서브, 그에 응하는 전력을 바치는 리시브.
'히나타는 너를 이기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할 거야.'
지난 밤 숙소에서 쿠로오는 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 그야 경기에 이기려고 하는 건 당연하잖아.'
켄마가 휴대폰 화면에 눈을 붙이고 대꾸하자 쿠로오가 재밌다는 듯 정정했다.
'그게 아니라 '너'를 말이야.'
히나타의 스파이크를 팔 아래쪽으로 받아 리시브, 팀원의 커버에 이어서 다시 켄마가 히나타를 향해 공을 빠르게 넘겼다. 간신히 공을 받아 넘긴 히나타가 쓰러져 있는 곳을 향해 켄마는 그대로 다이렉트. 히나타가 그 작은 몸을 있는 힘껏 늘여 한 번 더 리시브했다. 둘을 보면 옛날에 본 어떤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단도 한 자루씩 쥐고 초근접전으로 서로의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킬러가 생각난다. 지난 5월 둘이 서로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이 1년의 최종 결판. 후쿠나가가 벤치 앞까지 뛰어 리시브한 공이 네트에 아주 붙어 날아왔다. 애매한 공이다. 네트를 그대로 넘어갈 수도 있고 오버 넷을 유도하거나 리바운드를 하거나 또는 직접 넘기거나? 머리를 잘 써야 하는 일촉즉발의 그 순간 쿠로오가 화살이 공기를 꿰뚫듯 좁고 날카로운 켄마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네트 바로 앞에서 공의 최고점을 향해 뛰어올랐다.
아, 정말 오래되고 익숙한...... 눈물날 것 같아.
지금 키의 절반은 됐을까 싶었던 그 어릴 적에 티비에서 멋있는 걸 보고 왔다고 공터의 낮은 간이 네트 앞에서 팔짝거리며 멋졌단 기술을 어설프게 따라해보던 평범한 그런 날 중 하루.
'쿠로 이렇게 뛰는 게 맞아?'
'응! 켄마가 공을 올리는 가장 높은 곳 바로 아래서 점프해서 이렇게!'
'안 맞았잖아!'
'...이거 언제까지 하는 거야?'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사이. 우리가 쌓은 10년의 시간이 구차한 설명과 신호를 전부 대신한다. 세터-스파이커 초근접 세팅의 스파이크는 카라스노 리베로의 손에 맞고 카게야마의 셋업으로 이어졌다. 뛰어오르는 히나타 앞을 가로막는 건 네코마 전위 3명의 블로킹. 그대로 스파이크를 꽂는다면 벽에 잡힐 가능성이 크다. 히나타가 돌연 손에 힘을 풀어 페인트 모션으로 바꿨다.
그리고 읽혔다. 켄마가 블로킹 뒤의 비어있는 코트 앞쪽을 향해 딱 맞춰 달려들었다. 잡았다.
타 앙.
"..."
"..."
"노도와 같은 랠리! 마지막은 앞에 떨어뜨릴 것처럼 위장한 롱 푸시!! 영리한 공격으로 성공시킨 히나타 쇼요!!"
방금 분명 페인트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켄마가 코트 앞으로 달려드는 순간 공을 길게 밀어 달려드는 켄마 뒤쪽으로 보낸 것이다. 켄마가 뻗친 손 끝에 공은 살짝 맞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깜짝 놀랐다. 새끼 요괴 까마귀는 이미 뛰어오른 후 선택지를 두 번이나 바꿔 끝까지 고양이의 발톱에 붙잡히지 않고 공중으로 달아나 1점을 쟁취해냈다.
"야, 코즈메, 괜찮아?! 어디 다쳤어?!"
손을 짚으며 일어나다가 켄마가 힘이 풀린 건지 다시 코트 바닥에 쓰러졌다. 쿠로오가 그걸 보고 급하게 켄마에게 다가왔는데,
"즐거워."
온몸이 땀 범벅이 되고 힘은 다 풀렸으면서도 코트에 뺨을 대고 그렇게 중얼거리는 켄마의 모습에 아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화이트보드 위 검은 선과 흰 면의 벽들을 부수고 전략과 예상을 전부 뛰어넘어 온몸의 감각을 두드려오는 자극에 배구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딱히 그만둘 이유도 없어서 계속한다는 사람의 잇새로 새어나온 한 마디의 진심. 함께 10년을 배구를 하면서 처음 들어본….
'오늘은, 오늘 이기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어?'
'그냥, 보통 정도.'
'다음 번에는 꼭 필사적으로 뛰게 만들어서 우리가 이길 거야. 그래서, '별로'가 아니라 '분하다'거나 '즐거웠다'는 말을 하게 해줄 거야!'
공기가 떨리는 것 같았다. 히나타가 어느 때보다도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두 주먹을 힘껏 쥐고 소리쳤다. 마침내 용사가 마왕을 물리친 순간이었다.
"좋았어어어어!!!"
쿠로오가 평생 이 순간을 잊을 수 있을까. 아니, 켄마의 저 표정과 저 음성이, 저토록 홀가분하고 행복하게 웃는 쿠로오가 나의 평생에 잊힐까. 입술을 꾹 물었는데도 웃음은 새어나왔고 이름 없는 감정들이 한 데 섞여 눈물이 되었다.
삐 익
카라스노가 가속해 간다. 켄마도 히나타도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다 죽어가는 용사를 조종하면서 언제나 모순된 생각을 해. '아직 죽지마'. 아직, 아직. 좀 더 보고 싶어. 더 하고 싶어. 교차하는 환호와 탄식으로 쌓이는 1점, 1점이 축제를 끝을 향해 이끌었다. '괴롭다'. '힘들다'. '그래도 아직 끝나지 말아줘'. 팽팽하게 부딪치는 힘의 줄타기에서 공은 몇 번이고 아슬아슬하게 네트를 넘어다녔다. 카라스노의 2학년 윙스파이커가 경기 종반의 종반임에도 감탄이 나오는 카게야마의 아름다운 셋업에 부응해 극상의 스트레이트 라인샷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네코마의 부주장, 3학년 윙스파이커 카이가 리시브를 받아 공중으로 높게 올린 느리고 아름다운 A패스. 함성소리로 경기장이 떠나갈 것 같았다.
"강렬한 스트레이트! 하지만! 하지만 다시 올라옵니다. 함성이 울려 퍼지는 도쿄 체육관!!"
그 순간, 공이 천장을 향해 떠오르는 그 한 순간 경기장의 높은 천장도, 눈부신 조명도, 함성소리마저 전부 사라지고 반짝이는 코트는 학교 체육관 바닥으로, 유니폼은 연습용 티와 번호가 적힌 조끼로 바뀐 듯한 착각이 들었다. 무더웠던 지난 여름 5개교 합동 합숙에서 지겹도록 연습 경기를 했던 그 때의 한 순간인 것처럼. 카이의 리시브는 켄마의 머리 위로 똑바로 날아왔다. 센터와 레프트에선 스파이커들이 토스를 부르고 우리의 세터는 머리 위로 양 손을 곧게 올려 날아오는 공을 쥐었다. 어제도, 그제도, 지난 수십 수백의 연습 경기와 매일의 훈련에서 보여줬던 그 모습 그대로 한결같이. 공은 켄마의 두 손 끝에서 미끄러져 회전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삐익, 휘슬 소리가 길었던 랠리의 끝을 알렸다.
"아아 이건 땀이군요…. 공이 땀으로 미끄러졌네요~."
"아, 어떻게 이런…!"
"랠리 중 공을 만진 모두의 땀이 묻어 있기 때문이죠."
삑 삐이익―
마치 그런 수십 번의 연습 경기의 끝처럼 끝났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 랠리, 팽팽하고 굉장했던 경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이기는 걸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이상하게 그렇게 분하거나 하진 않았다. 리베로 미들블로커 교체 타이밍이라 코트 밖에 나와 있었던 쿠로오가 종료 휘슬 소리가 울리자 크게 한숨을 쉬며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가 일어나 앉았다.
"하아."
쿠로오도 그랬다. 얼굴은 땀으로 엉망이었지만 숨을 가다듬는 그 모습은 평소 연습을 끝내며 했던 그런 얼굴 딱히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쿠로오는 이내 일어나 코트 위 켄마가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가 섰다.
"우리가."
켄마가 앉은 채로 네트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든, 이기든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아나지도 않고, 악이 번영하지도 세상이 멸망하지도 않아. 장대한 세상을 달려가지 않아도, 그저 9X18m의 사각형 안에서 공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쓸 뿐이야."
네코마의 참모이자 뇌. 네코마란 체스판을 움직이는 플레이어. 켄마는 그대로 팔을 쭉 뻗으며 코트에 누웠다.
"하아~ 재밌었다!"
며칠 내내 도전해서 최종 스테이지를 클리어하고 게임기를 침대 한 켠으로 던지며 벌러덩 누웠던 것과 똑같이.
"쿠로,"
켄마가 일어나 앉으며 고개를 뒤로 돌려 쿠로오에게 말했다.
"나한테 배구를 가르쳐 줘서 고마워."
"아, 그래."
방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방금 켄마가, 켄마가.
"뭐?"
방금 켄마가 한 말이 정보처리가 안 된 건 쿠로오도 마찬가지였다. 켄마가 일어나서 코트 라인 끝으로 걸어가는데도 쿠로오는 고장난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삐그덕거렸다.
"잠깐, 잠깐, 잠깐. 잠깐 기다려봐, 이 바보야!!"
"엥? 왜 흥분하고 난린데."
미간을 약간 좁히며 별일이라는 듯한 얼굴로 걸어나가는 켄마와 울컥하는 얼굴은 손으로 가리며 연신 잠깐을 외치는 쿠로오를 보며 카이와 야쿠와 하나같이 웃고 말았다. 함께 배구를 해온 시간이 10년이었다. 처음 서로를 만났던 순간부터 배구를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전부 함께 지나오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청춘의 전부를 오롯이 바쳤던 시간들. 켄마, 정말 모르겠어? 쿠로오가 정말 순수하고 기쁘게 웃었다. '스포츠란 게 승패가 다지만 아이러니하게 선수들에게 승패 이상의 것은 따로 존재한다'. 알 수 있었다. 아마 카이도, 야쿠도, 쿠로오 본인도 알 것이다. 쿠로오가 어떤 경기를 이겼을 때보다도 기쁜 표정을 하는 이유를.
"감사합니다!!"
양 팀 전원이 엔드라인에 일렬로 정렬하고 인사를 하는 동안, 선수들이 네트 너머로 악수를 하는 동안 내내 박수가 길게 이어졌다. 쿠로오와 사와무라 양 팀 주장이 네트를 넘어가 포옹을 나누었다. 3학년들끼리, 그리고 지난 1년 함께 부딪쳐왔던 카라스노와 네코마 선수들끼리 서로 악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갈채가 쏟아지는 경기장, 어떤 특정 누군가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를 담아 깊게 고개를 숙이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공중으로 띄워 올린 공을 끝내 치지 못하고 자신의 눈과 귀에 경기의 종료를 담지 못했던 3년 전 미완의 경기가 갈채 속에서 마침내 끝을 맞았다. 누군가가 끌어 안아 오는 온기에 눈을 떴다. 육상 허들 선수다운 카라스노 매니저 시미즈의 호리호리하고 탄탄한 몸을 양 팔로 꽉 마주 끌어안았다. 각자의 최전선에서 훌륭하게 싸운 선수에게 걸어주는 빛나는 메달이었다.
응원석에까지 인사를 마친 후 네코마 배구부 전원이 네코마타 감독 앞에 모여 섰다.
"구체적인 반성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명장의 주름 진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잘 싸웠다."
그렁그렁한 네코마 전원의 눈동자에 감독의 다정한 시선이 한 번씩 지나갔다. 그리고,
"고맙다."
유니폼의 숫자 1 아래에 주장 마크를 단 우리의 캡틴에게 시선을 멈추어 말했다.
"감사했습니다!!"
'그럼 네트를 낮추면 되지.' 쿠로오가 셋이서 찾아갔던 어린 날 토요일의 체육관에서 만난 등이 굽은 그 노인, 네코마타 감독과 만났던 그 날을 떠올렸음을 그냥 어쩐지 알 수 있었다.
"감사했습니다!!"
전원 한 목소리로 네코마 캡틴의 인사를 복창했다.
봄철대회는 기본적으로 하루 한 경기지만 3회전과 준준결승은 사흘째 날, 그러니까 오늘 한꺼번에 치른다. 밥을 먹은 후엔 3학년들과 경기장 2층 난간과 통로를 크게 돌며 구경하다가 다음 시합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관중석 한 구역에 자리를 잡고 여름 합숙을 함께 했던 학교 중 하나인 후쿠로다니의 준준결승전을 응원했다. 그리고 옆 코트에서 이어서 시작된 카라스노와 나가노현 대표 카모메다이 고교의 준준결승전. 유스 대표로 뽑힌 단신의 대에이스 호시우미 선수가 있는, 블로킹이 특기인 학교다. 관중석에 앉아 켄마가 주는 사탕을 하나씩 까먹고 있다보니 경기 중계가 시작됐다.
"윙 스파이커 호시우미, 세터 카게야마. 양 팀 모두 청소년대표 후보 선수를 거느린 강호입니다! 키가 2m를 넘는 선수도 주목됩니다."
"이번 시합은 어떤 점을 주목해야 할까요?"
"전국에서 손꼽히는 블로킹 팀과 손꼽히는 공격력을 가진 팀이니까요. 네트 사이에서 서로 부딪치는 모습이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역시 이번 대회 최단신 스파이커 대결이죠. 호시우미 코라이 선수와 히나타 쇼요 선수. 양쪽 모두 상당한 포인트 게터니까요."
잠깐만 지켜봐도 이번 경기 절대 쉽지 않겠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카라스노가 굉장히 극단적인 타입의 팀이라면 카모메다이는 약점이 없는 팀이었다. 작은 키는 아랑곳 않고 서브면 서브, 공중전이면 공중전, 심지어 세터 대신 세팅도 깔끔하게 잘 하는 만능형 에이스에, 카라스노가 어느 방향에서 공격을 해오든 반드시 둘 이상의 빠르고 강한 블로킹을 붙여 오는 번치 리드 블로킹. 어느 팀에나 뛰어난 블로커는 있지만 저렇게 '훈련된 집단'에는 당해내기 힘들다. 히나타가 아무리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날아다녀도 카게야마의 세팅이 직접 스파이커를 향해 날아가는 순간 전까지는 카모메다이의 블로커들은 히나타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미끼'에 흔들리지 않는단 거다. 블로킹이 분산되지 않기 때문에 히나타 뿐만 아니라 카라스노의 다른 공격수들도 공격이 힘들어진다.
"야. 야. 힘내. 카모메다이의 블로킹이 완성되면 더 힘들어진단 말이야."
세터를 대신하는 호시우미 선수의 환상적인 원거리 토스에 이어 급기야 호시우미 선수의 서브 득점으로 한 걸음의 리드를 지키던 카라스노가 역전당하자 쿠로오가 심히 걱정스럽단 얼굴로 응원을 했다.
"고양이 다음엔 갈매기인가~ 하루에 리시브가 징글징글한 팀이랑 블로킹이 징글징글한 팀이랑 연달아 싸우는 카라스노도 어지간히 힘들겠지."
"니케가 카모메다이랑 붙은 팀의 스파이커였다면 저 블로킹에 어떻게 했을 거야?"
"그러게. 스파이커 입장이었어서 그런지 나도 블로킹이 뛰어난 팀이 제일 싫더라. 힘내야지 뭐."
카모메다이는 전위의 블로커 세 명이 줄곧 한가운데에 모여서 대기하더니 이번엔 네트 왼편에 자리한 카라스노의 3학년 윙 스파이커, 에이스인 아즈마네의 앞에 모여서 데디케이트 시프트(블로킹을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치우치게 하는 배치) 상태로 대기했다. 에이스에 압력을 건다는 목적인가? 이러면 다른 쪽에 틈이 생길 텐데. 역시 카게야마는 센터의 츠키시마에게 셋업을 올린다. 뻔히 블로킹이 만전의 상태로 대기 중인 곳에 셋업을 올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겠으나 카모메다이의 블로킹은 측면에서 대기하고 있었음에도 둘이나, 아니 셋 전부가 달라붙어 왔다.
"블로킹이 조직적인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팀은 까다로워. 거기다 쟤네 방금 중앙 대기가 아니었는데도 센터에 셋 전부가 달라붙어 올 만큼 반응도 빠르고."
"사이드에 압력을 거는 의도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 결과로 '한가운데'를 이용할 것까지 계산에 넣었을 가능성도 있겠지. 무서워."
"켄마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야…."
큰 점수 차는 아니었지만 점점 카모메다이의 영역이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야금야금 점수가 벌어지더니 이내 20:24, 카모메다이의 매치포인트. 히나타가 빠르게 달려나와 옆으로 높게 뛰었다. 그것에 순간 시선이 팔렸는데도 카모메다이는 히나타 뒤에서 뛰어올라 백어택을 하는 카라스노 에이스의 스파이크를 셧아웃시켜버렸다. 2m 3cm의 블로커라...
"하쿠바 가오!! 방금 히나타 선수를 상대로 한 번 점프를 했는데 말이죠. '연속 점프'로 충분히 막아냅니다. 제1 세트는 카모메다이가 선취합니다!"
누군가 컨디션이 나쁜 것도 아니고 다들 지친 것에 비해 움직임은 좋아 보인다. 그런데도 어쩐지 빠져나갈 수가 없는 폐쇄감. 편법은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기초가 수준이 높은 팀에 대해선 차근차근 싸워나가는 방법 밖에는. 카라스노도 카모메다이도 스타팅 로테이션을 약간 바꾸어 2세트에 나섰다. 켄마가 물었지 아까. 카모메다이와 붙는 팀의 스파이커였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일단은…
"히나타 쇼요! 벼락같은 속도로 라이트 쪽으로 뛰었습니다!"
"멋지게 성공합니다. 카라스노 1학년 콤비의 와이드 이동공격!!!"
'폭'. 원래 무의식적으로 보고 있는 시야보다 의식적으로 넓게 보고, 공격에 들어가는 영역의 너비를 넓게 잡는다. 어디서든 덮쳐오는 숙달된 3단 블로킹에 대항하여 상대가 고려해야 하는 또 한 가지 '불쾌한 정보'가 되도록. 히나타는 처리해야 하는 정보를 무지막지하게 늘려놓는 스파이커이다. 공격의 템포, 높이, 너비 등.
"카모메다이가 또 블로킹 배치를 바꿨네."
"릴리스인가. 에이스에게 꾸준히 압력을 걸 수 있도록."
상대팀 레프트나 라이트에 강한 스파이커가 있을 때 마크를 강화하기 위해 블로커 한 사람만 끝에 배치하는 릴리스 배치. 히나타가 날뛰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블로킹으로 꺾을 표적은 에이스라는 어필인 것이다. 카라스노의 주포이자 에이스, 아즈마네에게 보기 괴로울 정도로 끊임없이 압박이 가해지는 모습에 어쩐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아 계속 탄식이 나왔다. 강한 서브에 리시브가 흔들리고, 그런 불안정한 상황에서 어려운 공은 자연히 에이스에게 모인다. 카모메다이의 블로킹은 그렇게 공격수단이 좁혀진 상황에서 에이스의 스파이크를 셧아웃으로 처치해버리고, 변칙적인 점프 플로터 서브를 아즈마네에게 날려 보내며 계속해서 에이스를 마구 흔들었다. 상대의 흐름을 끊기 위해 카라스노가 타임 아웃을 부른다.
"으으으 아즈마네 힘내라…."
"아하하하, 니케 아까부터 표정이 괴로워 보이네. 질리도록 견제 받고 마크 받은 에이스."
"전위에 있으면 때리기 어려운 토스도 많이 날아오고, 상대팀 블로킹의 표적이 되고, 후위로 내려가면 서브로 표적이 되고. 에이스가 지는 책임은 너무 무거워. 나라면 그런 중요한 자리는 못해. 니케 사탕 먹어."
"세터를 하고 있으면서 책임감이 무거운 자리는 못하겠다니 말이 안 돼."
켄마가 내민 사탕 봉다리에서 메론맛 하나를 꺼내 입에 던져 넣었다.
카라스노는 타임아웃 이후로도 연신 고전했다. 일진일퇴, 점수 차가 크게 나는 건 아니지만 플레이의 주도권은 카모메다이에게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에이스란 게 그렇다. 점수가 뒤지고 있어도 에이스가 컨디션이 좋으면 팀도 기세가 오른다. 반대로 이렇게 점수가 뒤지고 있지 않더라도 에이스가 심하게 마크 받고 발이 묶이면 상대가 경기를 끌고 간다는 초조함과 폐쇄감이 형성된다. 블로킹에 맞고 크게 튀어 불안정한 리시브에 이은 불안정한 원거리 언더토스, 아즈마네에게 연결됐지만 스파이크는 셧아웃. 카라스노의 싱크로 공격, 한 번 더 아즈마네에게 날아간 셋업은 또 셧아웃. 카라스노가 두 번째 타임아웃을 불렀다. 손해인가, 에이스는. 그래도….
"그래도 나는 기꺼이 손해 보고 싶은 걸? 위기를 나한테 맡긴다는 건 그 자체로 자부심이야."
타임아웃이 끝나며 다시 코트에 오르는 아즈마네의 두 눈이 형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세터 카게야마가 리시브를 했기 때문에 다른 스파이커가 에이스에게 원거리로 토스를 보내왔다. 공이 블로킹에 강하게 맞고 떨어지는데 카라스노의 리베로 니시노야가 벼락같은 속도로 치고 나와 떨어지는 공을 받아냈다. 최강의 블로킹을 자랑하는 팀과 싸우는 방법? 언제나 코트에는 여섯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 블로킹에 마크 받고 서브로 견제 받고, 상대 팀 3단 블로킹에 혼자서 싸울 때도, 언제나 배구는 혼자가 아니라 여섯이서 싸우는 스포츠란 당연한 사실을 기억하는 것. 상대 팀 2m 3cm 미들 블로커의 스파이크를 튕겨낸 원터치로 공이 코트 끝까지 멀리 날아갔다. 3학년 세터 스가와라가 날렵하게 커버한 리시브가 세터 카게야마에게 연결되고, 카게야마가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정확하게 셋업한, 아즈마네가 가장 잘 때리는 네트 조금 떨어진 곳으로 올리는 하이 토스. 아즈마네가 뛰어올랐다. 활 시위를 당기는 것처럼 곧게 뻗은 상체를 있는 힘껏 젖히고 카라스노 제1의 파워를 자랑하는 에이스의 강스파이크를…
"어?!"
툭. 앞으로 떨어뜨리는 공에 숨을 헉 하고 들이킬 수 밖에 없었다. 분명 강타가 올 거라고 생각해서 자세를 단단히 잡았는데, 카모메다이 선수들이 그렇게 웅성거리는 것도 당연했다. 블로킹에 겁먹어 페인트를 선택하는 것은 흔한 패턴이지만 이건 그런 식의 '회피'가 아니었다. 저 철벽에 싸우는 건 혼자가 아님을, 언제나 어떤 순간도 코트에 오른 여섯이 함께 싸우는 것이 배구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고독감이나 중압감이 아니라 그렇게 '주위의 힘'을 느낄 때 비로소 시야가 한 뼘 넓어진다. '평소보다 의식적으로 넓게 본다'. 리시버가 넓혀준 한 뼘, 세터가 넓혀준 한 뼘, 스파이커가 넓힌 한 뼘이 합쳐져 벽 사이를 비집고 열어내는 틈이 생긴다. 코트를 뒤덮은 상대의 장막 사이를 뚫고 바람이 지나갈 틈이.
"아즈마네는 아까 그 페인트 이후로 뭔가 해방된 것 같네."
"이러면 진짜 모르겠다. 카라스노는 신기한 게 시합 중에도 계속 진화를 해."
한참을 길어지는 랠리 끝 마침내 3학년 세터 스가와라가 길고 높게 올린 셋업에 아즈마네가 혼신을 다한 강타로 블로킹과의 싸움에서 1점을 거머쥐는 것을 보고 쿠로오와 켄마가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호시우미의 서브 득점으로 한 걸음의 리드가 다시 20:20의 동점이 된 순간 히나타가 가장 빠른 초속공을 할 때의 마이너스 템포 그 속도 그대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거 아까 우리랑 경기할 땐 오픈 공격에서밖에 못 썼잖아!
"빠르다, 빠르다! 그리고 더욱 높다!! 히나타 쇼요!!! 브레이크에 성공하는 카라스노!!"
"아무리 높게 뛴다 해도 높이에는 한계가 있어. 키도 저렇게 작고. 그럼,"
켄마가 눈을 번뜩였다.
"높이를 빠르게 인가."
켄마의 눈이 빛나는 것도 당연하다. 히나타의 저 점프를 끌어낸 게 켄마의 새장이었으니까. 새장을 탈출하기 위해 히나타를, 카라스노를 여기까지 데려다 준 '빠름'이란 매혹적인 무기조차 과감히 내려놓고 하늘 높게 올린 토스에 맞춰 어느 때보다도 강한 도움닫기, 강한 점프로 오픈 공격을 성공해냈던 히나타였다.
"히나타 정말 고야두부 같아."
"그냥 스펀지 같다고 하면 되지 않아?"
쿠로오의 이상한 비유를 일일이 딴지 거는 켄마였다. 한 단계 더 위의 높이로 최단 타이밍에 도달. 단 카게야마가 셋업 가능한 범위의 최단. 다음엔, 다음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날아라'. 카라스노의 현수막이 카라스노에게 정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카라스노가 가진 과감함과 변화무쌍함을 있는 그대로 담은 말이었다. 까마귀 떼처럼 일제히 날아오르는 카라스노 전원의 1st 템포 싱크로 공격. 이번엔 히나타가 초속공의 템포로 뛰쳐나오지 않고 끝까지 한 가지의 선택지로 섞여든다. 그리고 바닥을 박차는 쾅 하는 점프. 카라스노가 2세트를 가져가며 1세트를 만회한다. 경기장이 달아오른다.
"자, 봄철대회 사흘째, 제일 가혹한 더블헤더! 하지만 이기면 준결승 센터코트! 카라스노 대 카모메다이, 운명의 마지막 세트!! 카라스노 빅 서버, 카게야마의 서브로 시작됩니다!!"
삐익!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카모메다이 응원석에 걸려있는 현수막을 흘깃 쳐다봤다. 지금 어떤 공격이 가능한지, 상대의 블로킹은 누구인지, 상대가 쓸 수 있는 공격은 어떤 것들일지, 이 순간에, 눈앞의 과제에 오롯이 집중해 정보를 처리하고 헤쳐나간다. 카모메다이에게는 '분위기가 안 좋다', '상대가 흐름을 탄다'라는 건 없었다. 위기이건 기회이건 담담하게 주어진 할 일을 해낸다. '카모메'. 갈매기란 이름답게 폭풍 속을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비행하는 갈매기 떼였다. 갈매기 떼와 까마귀 떼. 맑은 날도 궂은 날도 한결같이 비행하는 새와 탐욕스럽게 강함을 먹어치우며 꼭대기로 향해 온 새.
카모메다이의 강벽을 뛰어넘기 위해 히나타는 무조건 뛰어나오지도, 늘 섞여있지도 않고 기민하게 템포의 완급을 바꿔가며 카모메다이 부동의 블로킹을 분단시켰다. 누군가 나에게 이름을 붙여준다면 역시 '최강의 미끼'가 좋아. 스스로 나를 미끼라고 생각할 일은 아마도 평생 없겠지만. 줄곧 카라스노 전원의 싱크로 공격에 섞여 1st 템포의 점프를 하다가 느닷없이 초속공의 속도로 강한 점프를 하며 뛰쳐오른다. 이제까지 셋업이 직접 스파이커에게 날아가는 순간까지 꿈쩍도 않던 카모메다이의 블로킹이 분단되고 카라스노 2학년 공격수 타나카가 블로킹 하나 없이 텅텅 빈 전면의 코트에 스파이크를 꽂아 득점에 성공하자 히나타가 한 말이었다.
"카라스노, 브레이크으으으으으으!!"
"빠릅니다, 빠른 백어택!! 자기가 받아 올린 공을 직접 성공시킨 히나타 쇼요!!"
"치열한 랠리를 제압한 것은 카라스노, 여기서 역전!!!"
"이야~ 카모메다이의 집요한 블로킹에, 카라스노의 높은 공격 의식과 츠키시마 선수의 과감한 한가운데 승부. 그리고 작은 용사들의 스파이크 리시브…! 양쪽 모두 기세가 대단하네요!"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는 답답한 점수 차를 가까스로 마침내 뒤집은 카라스노. 이대로 흐름을 탈 수 있을까요!"
이제 경기는 3세트 중반, 튼튼한 방패 속 빛나는 창, 공중전에서 당해낼 재간이 없는 청소년 국대 에이스를 보유하며 약점 없이 모든 걸 잘하는 카모메다이, 위기에서 더더욱 비틀어 만드는 현란한 속공과 전원의 높은 공격 의식으로 치고받는 싸움을 제압해 온 카라스노의 열전이 히나타의 백어택 마이너스 템포 속공으로 긴 랠리의 승부가 판가름났다.
"대박."
"2m 미들 블로커의 그 속공을 받아낸 거 말이지. 엉망 초짜 리시브였던 5월의 모습은 이제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완전히 나이스 리시브였네, 히나타. 진짜 준결승 가는 거 아니야? 마지막 백어택의 속도는 또…어?"
"어?"
옆에 앉아 있던 쿠로오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히나타가 타나카의 손을 잡고 일어나려다 그대로 코트 바닥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카라스노가 타임 아웃을 불렀다.
"부상…은 아닌 것 같은데?"
"열을 재는데?"
"쿠로, 진정해."
쿠로오가 눈에 띄게 안절부절 못하자 켄마가 일부러 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둘을 보니까 마음이 안 좋았다. 누가 경기 중에 쓰러지는 걸 지켜보는 입장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관중석의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경기장으로 내려가는 통로로 달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니케 어디가!"
"야, 너 괜찮은 거야?"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한다는 마음이 무작정 발걸음을 경기장으로 끌었다. 무엇을? 숨이 차도록 뛰어 어느새 코트와 벤치가 바로 앞에서 보이는, 경기장의 펜스 앞에 다다라 있었다.
"부상도 아닌걸요. 부상도 아니잖아요…!"
히나타가 카라스노의 우카이 코치를 붙잡고 절박하게 말하고 있었다.
"사와무라 때와 똑같아. 가서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와. 자, 히나타."
타케다 감독이 히나타를 타일렀지만 경기를 나가겠다는 히나타의 집념은 타이름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스스로가 히나타 입장이었어도 똑같았을 것 같다고, 병실에서 베스트 스파이커 상패를 집어던지던 일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식식거리는 히나타의 숨소리가 여기까지도 거칠고 선명하게 들려왔다. 타케다 감독은 히나타의 그 얼굴을 보고 놀랐다가 이내 다시 단호히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너는 듣고 싶지 않겠지만 그래도 얘기할게. 지금 더 이상 너를 경기에 내보낼 수는 없어."
히나타의 얼굴은 꼭 사형 선고라도 들은 사람 같았다. 경기에 내보낼 수는 없다는 말이 가슴에 칼처럼 찔려왔다. 그 말이 너무 아파서 아랫입술을 꾹, 세게 물었다.
"너는 중학교에서 경기를 못 했던 만큼 '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남들보다 더 기뻐했지. 그러니 더 속상할 거야. 그러니까,"
타케다 감독은 벤치에 앉아 눈을 부릅 뜬 히나타 앞에 두 무릎을 바닥에 대고, 히나타의 손을 조심히 붙들었다.
"알겠니? 히나타. 앞으로 다시는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새겨둬. 어쩔 수 없는 일은 늘 일어나는 법이니까. 그때마다 주의깊게 새겨두렴."
숨을 쉬는 것을 잊은 것처럼, 그저 앞에 있는 펜스를 꽉 붙잡고 펜스 너머의 광경에, 히나타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마디 한마디를 꼭꼭 눌러 쓴 손 편지처럼 발음하는 타케다 감독의 음성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너는 장래에 금메달을 따겠다고 했어. 몇 개나 딸 거라고 했지. 그리고 너는 지금 '막무가내 억지'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그때 필요한 것은 지식, 이성 그리고 사고. 히나타, 지금 이 순간도 '배구'야. 이기는 일만 생각하렴."
부릅 뜬 눈은 그대로 어느새 히나타는 울고 있었다.
"네 몸은 앞으로도 더 크겠지. 하지만 네트라는 높은 벽 너머로 벌어지는 경기이자 190cm가 '몸집이 작다'는 소리를 듣는 배구 세계에서는 분명 너는 앞으로도 쭉 '작을' 거야. 남들보다 기회가 적을 거라고 진심으로 받아들여. 그리고 그 적은 기회를 하나도 놓치는 일이 없도록 움켜쥐는 거야. 너는,"
경기장이 고요한 것 같았다. 경기의 열기가 담긴 주변의 소음이 전부 사라진다.
"너는 꼭 언제나 만전을 다하여 기회의 가장 앞줄에 있도록 해."
선수가 교체되었다. 히나타가 나가고, 2학년의 다른 선수로.
"죄송해요. 죄송해요…!"
히나타 만큼이나 다른 선수들이 속상하지 않을 리가 없다.
"너무 까불대며 놀다가 열이 나다니! 어린애냐!"
타나카가 되려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녀석 애 맞아요, 타나카 선배. 그보다 하룻밤 자고 나면 낫겠죠. 체력은 괴물이니까."
"걱정하지 마! 나리타랑 나한테 맡겨!"
"네가 없으면 힘들어. 당연히 힘들지. 히나타, 우린 네가 필요해. 그러니 밥 먹고 푹 자!"
카라스노의 주장이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히나타에게 말했다.
"우리보다 먼저 생강구이 먹겠네!"
3학년 세터 스가와라도 명랑하게 웃었다. 히나타가 경기장을 나서는데 카모메다이의 호시우미 선수가 외쳤다.
"히나타 쇼요!"
타케다 감독과 함께 코트 밖을 향하던 히나타가 호시우미의 말에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히나타는 호시우미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오늘 경기 중에 히나타가 돌아오긴 어려울 것이다. 호시우미가 한 말의 의미는 미완으로 끝난 둘의 대결을 언젠가 제대로 결판 내기를 기다리고 있겠다고, 승부의 막바지에 다다른 경기 종반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퇴장했어야만 하는 선수에게 건네는 가장 큰 위로이며 상대에 대한 인정이었다.
"경기 종반의 파란…! 여기서 카라스노 1학년 포인트 게터가 이탈…!"
카라스노 전원이 둥글게 모여 손을 모았다.
"경험 부족 준비 부족. 그 전부를 통틀어, 우리의 전력이다."
"카라스노, fight!!"
"으아아아아아아!!"
주장 사와무라의 결연한 목소리에 카라스노의 선수들도, 카라스노 응원석의 사람들까지도 기합을 넣는다. 경기가 재개됐다.
카라스노 vs 카모메다이. 종반으로 접어든 경기를 관중석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이 플로어에서 펜스 너머로 지켜봤다. 선수들이 선 코트와 같은 높이에서, 같은 바닥을 밟고서. 히나타가 이탈한 후에도 양쪽 모두 양보 없는 승부를 펼쳤다. 정말로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팽팽한 싸움이다. 누군가는 이기기 때문에, 누군가는 반드시 지는. 시점만 다를 뿐이지 우리 모두가 언젠간 진다. 강할수록 더 강한 자에게 질 뿐, 언젠가 모두 패자가 된다. 승리라는 건 패배에 반대되는 말로 존재하지만 실은 너무나 선명하고 또렷한 '패배'에 비해 더없이 찰나이며 실체가 없다. 그 누구도 패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가장 강한 사람조차도 영원히 최고이지 않기에.
그럼 우리가 흘린 땀은 무의미할까. 한계를 넘어가며 아득바득 싸워 온 이 여정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경기에 나갈 수 없다는 결과를 받아들고 코트를 떠나 한참을 밖을 헤매다 여기까지 와서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어떤 '다음'으로 향할 것인가, 어떤 '내일'을 바랄 것인가. 승패에 상관없이 자신의 '내일'을 정하는 선택의 순간만큼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가고 싶은 '다음'을 향해 날아가는 것, 긴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마침내 발견한 승리란 것의 진짜 얼굴이다.
"할머니! 내 이름은 무슨 뜻이야? 누가 지었어?"
수업 시간에 먼 외국의 어떤 오래된 여신상을 봤다. '니케'라는 이름의 승리의 여신, 어깨의 날개를 펴고 막 비상하려는 순간의 모습을 한 여신상이었다. 그날 집에 돌아가자마자 할머니에게 이름에 관해 물었다. 아마 이름에 대해 처음으로 궁금함을 가졌던 날이었을 것이다. 그때 할머니는 놀란 듯 잠시 가만히 계시더니, 무릎을 꿇어 어리던 이의 눈높이까지 몸을 낮추고는 두 손을 꼭 잡아왔다. 눈과 눈을 맞추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목소리로.
"바라는 것을 강하게 손에 쥐란 뜻이란다. 알 수 없는 길이라도 두려워하지 말고 걸어보란 뜻이란다. 마땅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아이에게 붙여준 이름이란다, 니케."
"......!!!"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왜인지 굉장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슈크림 파이를 먹을 때만큼 행복하고 벅찬 기분이었다.
"그럼 나 슈크림 파이 먹을래!!"
"아이구, 그래, 코코아랑 같이 천천히 먹그라, 내 새끼."
삑, 삐이익―...
갈매기와 까마귀, 어느 쪽도 맹금류는 아니다. 끝없이 드넓은 바다 위 수평선을 향해 비행하는 새, 산이며 들이며 하물며 도시의 하늘 그 어디든 자유롭게 비행하는 새. 승패가 중요치 않다는 뜻이 아니다. 져도 되는 시합이란 건 없다. 단지 승패에 상관없이 양쪽 모두에게 존재하는 한 가지 자유가 있을 뿐. 날아가고 싶은 '내일'을 향해 날개짓하는 일, 갈매기에게도 까마귀에게도 주어진 가장 강한 무기는 그 두 날개니까.
여기에 올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흘째의 '봄'이 끝났음을 알리는 휘슬 소리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밤이 다 된 늦은 저녁 학교로 돌아왔다. 이겼든 졌든 시합 후엔 늘 체육관에 돌아와 미팅을 한다. 그날의 플레이를 반성하고 피드백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평소 같으면 그렇겠지만......
"......"
"......"
후배들의 얼굴에 울멍울멍하게 울음기가 맺힌다. 오늘 무대를 끝으로 3학년들의 활동은 공식적으로 종료된다. 후회없이 노력했고, 가진 힘을 전부 쏟으며 싸우고 왔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닥쳐오는 아쉬움이란 것도 존재한다.
"이미 너희들은 잘 알고 있을 게다. '이어간다'는 것의 의미를."
아직 공은 코트에 떨어지지 않았다. 너의 그 무엇도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네코마타 감독님이 지난 봄에 해주었던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기대하고 있으마. 너희들의 '다음'도."
설렘이 담긴 네코마타 감독 특유의 웃는 얼굴... 느긋하고 또 장난스럽게 웃는 네코마타 감독님은 3학년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고 안아주는 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고맙구나, 니케."
네코마타 감독과 악수와 포옹을 하면서도 끝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겨우 목소리를 끌어모아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전국대회를 치른다고 며칠 외박했던 짐들하며, 그 며칠 한계의 한계를 넘어 싸우면서 완전히 방전된 몸이며, 여정을 마치고 마침내 돌아왔다는 노곤함하며... 다들 집에 가기 위해 빠르게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아, 문 내가 잠그고 갈게. 먼저들 가라~"
쿠로오가 손가락으로 체육관 열쇠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주장도 빨리 집 가서 쉬세요, 하는 말들로 네코마 배구부원들이 교문으로 향하고 쿠로오는 가볍게 손을 흔들다 이내 불 켜진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으로 환한 빛이 쏟아지고, 그다지 서두르지 않는 느린 발걸음이 왔다갔다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평소엔 딱히 그렇게까지 하지도 않는 짐 정리, 현수막 정리, 공 정리...... 사실 쿠로오가 할 일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그렇고 방금 은퇴까지 한 마당에. 애초에 뒷정리가 필요할 만큼 어질러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빛이 쏟아지는 문과 나란하게 체육관 벽에 기대어 서서 솔직하지 못한 이의 느린 발걸음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그러다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배구공 하나가 늦은 저녁의 어스름에 잠겨 저 구석진 곳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갖다줘야겠네. 집고 보니 어지간히도 낡고 닳은 헌 배구공이었다. 어쩌면 꽤 오래 전부터 이렇게 밖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달... 아니 몇 년을. 낡은 공을 들고 잠시간 빛바랜 그 색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자."
마침 배구공 보관 카트 앞에 서 있던 쿠로오에게 공을 내밀었다.
"어? 아직 안 갔었어?"
눈을 동그랗게 뜬 쿠로오가 공을 받아들었다.
"밖에 이거 있길래 주러 왔지."
그 말에 쿠로오는 잠깐 눈을 깜빡이며 이쪽을 보다가 푸스스 웃었다. 거짓말인 줄을 아는 거다. 숨길 생각이라곤 하나 없는 당연한 거짓말. '네가 걱정돼서 기다렸어'. 말하지 않아도 두 눈에 투명하게 비쳤을 진심이 촌스럽고 구구절절한 변명도 설명도 전부 대신한다.
"아~ 주장이 서프라이즈로 정리 좀 해주려고 했는데 들켜버려서 큰일났네.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라니깐."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는 사람의 존재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 몇 년에 걸쳐 깨달아왔다.
"그럼 이제 쌤쌤으로 치면 되겠다. 너도 내가 네코마중에 상패 보러간 날 닌자처럼 따라왔으니까."
"! 아니 그때 그건 켄마가......!"
뭐라 말해보려다 일시정지 된 쿠로오가 상당히 웃겼다. 그러다 자기도 그 낡은 공을 카트에 넣으면서 킥킥거린다. 미련...보다는 작별이겠지. 단언하건대 쿠로오를 아는 모든 순간을 걸고 최선을 다해 온 후회 없는 끝이니까. 그리고 네코마중에 둔 상패를 보러 갔을 때 그런 마음이었으니까. 그래서 떠올랐다.
"나 네가 새해 첫날 센소지 가서 소원으로 빌었다는 거 뭔지 알 것 같아. 무려 전국 우승보다 탐나서 신년 소원으로 빌었다던."
"난 너 이럴 때 무서워. 네가 풀파워로 친 스파이크가 얼굴로 날아올 때보다 더... 아니 아니다, 그게 더한가."
"하나는 쓰레기장의 결전이 이번 전국에서 성사돼서 감독님 염원이 이뤄지는 거... 다른 하나는 배구부를 떠나기 전에 켄마가 배구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거. 그때는 그냥 짐작만 했는데 오늘 너 보니까 맞는 거 같아."
"...방금 한 말 취소. 스파이크보다 이게 더 무섭네. 아, 근데 하나 더 있어. 뭐 이건 이뤄졌는진 모르겠지만."
"와... 세 개나 빌었냐. 내 예상보다 더 빈틈없이 욕심 많은 놈이었네 이거... 신령님이 기가 막혀 안 했냐? 뭔데 마지막은?"
"그럼 말해주면 대답해줄래?"
"뭘?"
"'니케가 배구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으면.' 이거야, 세 번째 소원."
머리를 망치로 얻어 맞은 것 같다는 표현을 오늘 이해했다. '후회하지 않았으면'? 정말 쿠로오의 말에 머리가 멍했다. 너무나 당연해서 물을 필요조차 없었던 저 두 바람과 함께......
"...그건 정말로 새삼스럽네. 그럼 한번은 제대로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쿠로오의 손을 가만히 붙잡아 그 손끝을 보면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고마워, 날 공터로 불러줘서. 매일 같이 배구하자며 불러줘서. 배구를 가르쳐 줘서."
진작 말해줄 걸. 그 아쉬움에 더 분명하게, 또박또박 말이 나왔다.
"고마워, 헤맬 때도 곁을 지켜줘서. 길을 잃지 않도록 잡아줘서."
덕분에, 정말로 덕분에.
"고마워, 매니저 해보지 않겠냐고, 또 한번 배구하자고 불러줘서."
이쪽을 보던 쿠로오가 고개를 떨궜다.
"고마워, 쿠로오. 덕분에 이제 나는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 이 전국대회는 너에게 받은 선물이야. 고마워."
왜 우는 걸까. 죄책감이라도 갖고 있던 걸까. 어느새 큰 키를 숙여 양 팔로 끌어안아 온 그를 세게 마주 안았다.
탕, 타앙 타앙 타앙 타앙.
공을 바닥에 튕기는 소리가 체육관 전체에 공명하듯 울렸다. 몇 차례 바닥에 공을 더 튕기다 이내 코트 너머, 세터 정 위치에 선 켄마에게 토스했다. 켄마는 자신의 머리 위로 똑바로 날아오는 공을 받아 네코마가 자랑하는 바로 그 최소한의 모션으로 셋업을 올려 센터에서 뛰어오른 쿠로오에게 공을 잇는다. 교복 넥타이가 나부낌과 동시에 쿠로오의 스파이크가 코트를 넘어 날아왔다.
파아앙.
천천히, 높게 떠오르는 공이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면서 체육관 바닥을 울리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나이스 리시브 니케. 일정하고 나직한 톤의 켄마 목소리가 듣기 좋다.
"기다리고 있을게."
쿠로오가 오랜 친구들을 보며 잘생기게 웃어 보였다.
"그래, 먼저 가있어."
운동복 대신 교복을 자켓까지 갖춰 입고 한 손엔 저마다 졸업 증서를 든 채 교문을 나서는 쿠로오, 카이, 야쿠를 네코마 배구부 후배들과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더 이상 차갑지 않은 바람결에 봄이 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 한 해가 설레오기 시작한다.
-2013. 3.
making behind
하쿠신 니케 (霸九心 ニケ)
네코마 고교 팀원들의 이름은 전부 고양이와 관련하여 지어졌다. 니케의 이름은 '고양이의 목숨은 아홉 개'라는 속담에서 온 것. 스포츠 챔피언의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승리가 아니라 수수하고 들풀같은 집념의 승리를 거머쥔 니케의 스토리와 일맥상통한다. 추락에서부터 '내일'로 '다음'으로 또 이어간 명실상부 네코마 고교의 승리의 여신(Nike). 네코마의 현수막 '츠나게(이어라)'에 걸맞는 최고의 승리라고 팬들은 평한다.
친부모가 니케라는 이름 붙였던 배경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승리의 모습이란게 아이러니.
霸는 으뜸, 승리란 뜻의 한자. '전국제패, 패권'의 패.
성을 이루는 조각들을 이어 하쿠신 이라고 합치면 白心과 발음이 같다. 순백의 새하얀 마음, 초심, 처음 시작하던 때의 순수한 즐거움.
생일 4월 6일
최초의 올림픽인 1896년 아테네 올림픽이 개최된 날짜.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는 우승한 선수들의 머리 위를 날며 여신 니케가 축하했다고 한다.
탄생화는 복수초(福壽草)
이른 봄에 산과 들 곳곳에 피어난다. 추위를 뚫고 봄을 알리는 가장 빨리 피는 꽃 중 하나. 추위를 이기고 핀다는 점도, 화려한 꽃이 아니라 들풀이란 것도 니케와 닮았다. 제목인 '들풀로 만드는 월계관'에 어울리는 탄생화라 할 수 있겠다. 복수초의 이파리는 월계관과 모양새가 흡사한 점도 주목할 점. 그래서 니케가 하고 있는 목걸이가 월계관인지 복수초인지는 알 수 없다. 꽃말은 영원한 행복.
내지 일러스트의 배경에 보이는 것이 들풀과 복수초이다.
니케의 포지션이었던 WS(윙 스파이커)가 정해진 과정
니케는 키도 체격도 다소 빠르게 크는 여자아이 또래에 비해 늦게 컸기 때문에 배구팀 안에서는 더 작은 편이었다. 미들블로커 아웃. 경기 내내 쉴 새 없이 머리를 굴리는 사령탑 역할을 하다간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세터 아웃. 공격하고 싶다. 리베로 아웃. 그래서 남은 게 윙스파이커였으나 자기 스테이터스에 잘 맞는 거 고른 거다. 중학교 3학년 도쿄 결승전 기준 파워4 스피드5 체력5 탄력성4 기술3 두뇌2. 기술과 두뇌 수치가 굉장히 높은 켄마나 쿠로오와는 완전히 정반대 타입의 스테이터스를 가졌다. 힘과 체력이 높은 전형적인 에이스 윙스파이커 포지션의 능력치 분포. 화려하고 돋보이는 경기 모습은 주로 스피드 수치5에서 기인했다. 작중 스테이터스 상 윙스파이커 에이스 선수 중 스피드가 5인 선수는 없는 것만 봐도 얼마나 독특한 타입인지 짐작 가능. 육상을 했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중학교 때 육상 허들을 했던 카라스노의 매니저 시미즈 키요코(이쪽도 스피드5)와 여러 모로 닮은 구석이 많다. 카라스노의 라이벌 학교란 특성을 가진 네코마에서 시미즈의 대응 인물은 당연 니케다.
5
졸업 이후 미래편에선 전혀 나오지 않다가 최종화에 등장.
2020 도쿄 올림픽에서 니케는 외국 대표팀 감독을 하고 있는 친부와 생애 처음으로 마주친다. 쳐부숴줄테니 각오하라고. 자, 자, 의사 양반이 사람을 쳐부수면 쓰나~? 하고 니케를 데리고 가는 일본 배구협회(JVA) 쿠로오는 덤.
' 이어라繋げ '
니케는 2021년 응급의료학과 담당 교수 펠로우로 2020 도쿄 올림픽 일본 선수단 의료팀으로 참가한다.
어제의 패자들.
오늘의 너는 뭐지?
'발리볼(배구)',
코트 중앙의 네트를 사이에 두고
두 팀이 서로 공을 친다.
공을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잡아서도 안 된다.
세번의 발리를 통해 공격으로
연결하는
구기운동이다.
-end
감사합니다.
epilogue
"쿠로."
"응?"
"쿠로는 니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어떻게 라니 무슨 의밀까나. 워낙 바쁘신 분이라 이따 저녁에 셋이서 오랜만에 한잔 할 약속이 잡힌 것이 아주 눈물나게 감동적인!?"
"쿠로 진지하게 답해주면 나도 이거 답해줄게. 친구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니케 좋아한 적 없었어?"
"......"
당연히 이미 옛날부터 몇 번이고 생각해본 적 있는 물음이었다. 고교 3학년, 전국대회로 향하는 도쿄 대표 마지막 티켓을 거머쥐고 니케와 야쿠, 카이 넷이서 부둥켜 안았을 때 펑펑 우는 니케를 보고, 중학교 3학년, 부주장이 전국대회 행 티켓 대신 전해준 베스트 스파이커 상패에 얼굴을 묻고 울던 그때의 니케가 생각나 순간 완전히 개인적인 다른 마음이 들어 흠칫 하고 혼자 놀라기도 했으니까. 오래된 그 감정의 정확한 이름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날 저녁 학교로 돌아와 배구부 미팅 후 함께 하교하는 길 내내 벼르고 벼르다 집으로 들어가려는 니케를 붙잡고 한참 얼굴만 쳐다본 적이 있었다. 확인하고 싶은 게 있는데, 확인해보고 싶은데. 니케는 자신을 붙잡아 한참을 아무 말 못하고 쳐다보기만 하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끝내 '아니야, 들어가' 라고 말을 꺼내자 내 두 손과 자신의 손을 전부 하나로 포개더니 고맙다고 했다. 신화 속 여신 니케가 올림픽 우승자를 축하할 때 이런 얼굴로 웃었을까. 그때 니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었다.
"...끝이야? 그래서 결국 니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 됐고 됐고, 됐으니까, 이제 켄마 너 차례야. 난 말했다?"
"되긴 뭐가 돼. 치사하네, 쿠로 그렇게 얼렁뚱땅... 하아, 난 초등학교 4학년 때..."
"초4?! 빨라!"
"...우리 학교 몇 번 옆 학교랑 경기하고 그랬잖아. 나 초4고 너네 초5 때 우리 학교에서 세터로 나가던 사람이 아파서 못나왔는데 그때 쿠로가 '코즈메가 세터 할 수 있다, 매일 세터 연습한다'고 말해서 내가 대신 나가게 된 거 기억나? 그게 내 첫 시합이었는데."
"...코즈켄 님 무섭다...... 그래서 그 10년 전 불쌍한 치비쿠로에게 이제와서 화낼 생각은 아니지...?"
"그날 서로 한 세트씩 따고 3세트까지 갔는데 그 마지막 세트가 안 끝나고 계속 길어졌어. 경기 최종반 타임 아웃에서 내가 세운 작전을 해보기로 결정됐는데 그게 나도 될 거라고 확신은 안 가는 무모한 작전이었거든. 이미 풀세트를 교체 없이 뛴 니케가 작전대로 뛸 수 있을 지도 모르겠고. 괜찮겠냐고 니케한테 묻는데 '이기는 거 좋아하잖아. 켄마도, 나도.' 라면서 씩 웃더라. 무리한 작전이었는데 거짓말처럼 다들 그 작전대로 뛰어줬고, 마지막에 블로킹을 따돌리고 니케의 스파이크가 코트를 꿰뚫는 소리가 났을 때... 그때 알겠더라. 왜 사람들이 '승리' 라는 추상의 개념을 여신으로 만들었는지."
"와......"
"환호하는 니케, 공간을 가득 채우는 함성, 내가 세운 작전으로 경기 승리, 그때부터 승리라는 이미지는 언제나 니케야."
"와, 켄마 쇼크... 그렇게 구체적으로 계기가 있었을 줄은... 나도 지금 알았네."
"근데 바로 접었어."
"어? 왜? 한 번도 말도 안 해보고?"
켄마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잘게 웃었다.
"나랑 똑같은 표정으로 니케를 보고 있었거든. 너가."
들풀로 만드는 월계관
完
누가 물었다. 쿠로오와 켄마를 좋아해본 적 없었냐고. 그 말에 니케는 이렇게 답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함께 한 모든 형태의 시간들에 한 순간도 후회 없이 사랑했다고. 배구를 사랑하고, 도전을 사랑하고, 서로의 청춘의 페이지에 서로가 있음을.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했다고. 그건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thanks to
花田華絵, 白沼蓮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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